톱스타들의 명암이 엇갈리고 있다. 장기간 휴업에 들어가는 스타가 있는가 하면 오랜 휴식 끝에 돌아오는 스타도 잇따르고 있다. 장동건·권상우·이영애·김태희 등 소위 대한민국 연예계의 대표주자들이 다음 작품 계획을 내놓지 않고 있는 반면 문소리·문근영·송혜교·김정은 등은 속속 안방극장으로 복귀했다. 휴업하는 스타들은 “자기 계발 또는 달콤한 휴식의 시간을 즐기고 있다”거나 “나에게 맞는 작품을 기다려왔다”고 목소리 높여 말한다. 하지만 이들이 휴식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도 있을 터. 스타들의 이름값에 연연하지 않는 높아진 시청자들의 눈높이와 제작편수·흥행작품이 눈에 띄게 위축된 지금의 영화계 실정이 이들의 휴업을 부채질하는 것은 아닐까.
과거에 잠시 흥행의 단맛을 본 스타들은 속절없는 추락의 그늘을 견딜 수 없어서, 전작에서 부진의 쓴맛을 본 스타들은 또 다시 실패할 경우 뒤따라올 비난의 시선이 두려워서 전전긍긍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최근엔 캐스팅을 놓고 ‘출연한다 안 한다’는 말이 하루에도 몇 번씩 뒤집어질 만큼 혼란의 연속이다.
고소영과 김태희는 차기작이 머뭇거려지는 배우다. 고소영은 계속되는 영화 흥행실패에 한동안 CF활동만을 하다가 지난해 다시 본격적으로 스크린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단독 주연 영화였던 <아파트>와 <언니가 간다>는 흥행참패를 기록하고 말았다.
더욱이 <아파트>는 워낙 인기 있었던 동명의 인터넷 만화가 원작이었고 <언니가 간다> 역시 기본 스토리는 탄탄했던 터라 흥행실패의 화살은 모두 고소영에게 돌아갔다. 아름다운 외모는 여전했지만 영화 <구미호>, <비트>와 같은 성공의 기쁨을 다시 누리지는 못했다.
김태희도 마찬가지다. <천국의 계단>에서 신인으로서 ‘악역을 잘 소화해냈다’는 평가를 받은 김태희는 그 이후 계속 답보의 연속이다. 연기력의 상승곡선이 보이지 않고 있다. 지난 2006년 말 개봉한 <중천>은 정우성과 김태희의 캐스팅, 막대한 제작비가 투입된 무협영화로 많은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였다. 화려한 CG와 액션은 좋았지만 극을 이끌어가는 멜로라인을 형성하기엔 정우성과 김태희 모두 역부족이었다. 특히 김태희는 너무나도 아름답기만 했다. ‘첫 작품이라서’라는 위로 후 두 번째로 도전한 작품은 영화 <싸움>. 처음보다는 많이 나아진 연기력에 감독 및 많은 관계자들이 흡족해했다는 보도가 영화에 앞서 나왔다.
하지만 영화를 본 관객들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독특한 연출력으로 주목받던 한지승 감독과 연기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배우 설경구까지 가세했음에도 영화는 조용히 막을 내려야 했다. 김태희는 차기작으로 2009년 상반기 방영예정인 드라마 <아이리스>에 출연할 예정이다.
2008년 초 <숙명>에 올인 했던 권상우도 힘쓴 만큼의 결과는 얻지 못했다. 심지어 최근에는 박진표 감독의 <내사랑 내 곁에>에서 돌연 하차해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12월 중순 영화 <슬픔 보다 더 슬픈 이야기> 크랭크 인에 참여한 뒤, 내년 초 1인 2역으로 등장하는 드라마 <신데렐라맨>에 출연할 것으로 알려졌다.
탄탄한 대본·배우들 호연 뒷받침 대박
스타들의 고액출연료…제작 무산 속출해
이제는 톱스타들의 이름만으로 작품의 흥행이 좌지우지되던 시절은 지났다. 톱스타 없이도 탄탄한 대본과 연출력 있는 배우들의 호연이 뒷받침되면 이른바 대박을 터뜨릴 수 있다는 점은 톱스타들의 설 자리를 좁게 만들고 있다.
‘흥행의 보증수표’로 일컬어지는 스타를 앞세운 드라마나 영화들이 잇따라 흥행에 실패하자 갈수록 몸값이 치솟고 있는 스타 배우들의 효용 가치가 지나치게 과대 포장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더 이상 관객은 작품을 단지 스타가 출연했다는 이유만으로 선호하지는 않는다”며 “대중이 관심을 가질 만한 소재를 발굴해 전문적 기획력을 강화해 작품의 완성도를 더욱 높이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스타들의 눈높이가 여전히 높다는 점은 스타들의 ‘휴업사태’를 빚어내고 있다. 지속적인 한류 열풍과 외주 제작사의 활성화로 출연료가 턱없이 높아진 상황에서 톱스타들이 쉽사리 소위 ‘이름값에 대한 자존심’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영화를 고집하던 스타들이 브라운관 회귀를 도모하고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위축된 영화계를 떠난 스타들이 드라마에서 활로를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첫 스타트를 끊은 톱스타는 문소리. 문소리는 지난 9월6일 첫 방송된 MBC 주말드라마 <내 인생의 황금기>로 안방극장에 복귀했다. 이어 문근영이 지난 9월24일 첫 방송된 SBS 월화드라마 <바람의 화원>으로 안방극장으로 돌아왔다.
뒤를 이어 송혜교가 <그들이 사는 세상>(KBS 2TV), 김정은이 <종합병원>(MBC)으로 컴백했고, 최지우는 <스타의 연인>(SBS), 이병헌은 <아이리스>, 신현준과 소지섭은 <카인과 아벨>(SBS)로 시청자들을 만날 예정이다.
영화를 고집하던 스타들이 브라운관 회귀를 도모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느긋하게 자신의 연기를 모니터하고 잘못된 부분은 언제든지 수정할 수 있는 영화에 비해 드라마는 촬영 직전에야 나오는 쪽대본은 물론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정신없는 일정으로 그동안 톱스타들에게 외면 받았다. 게다가 철저한 준비 없이 안방극장으로 돌아오다 보면 자신의 결점이 만천하에 공개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톱스타들이 이런 위험 부담을 안은 채 드라마로 컴백하는 가장 큰 이유는 충무로의 투자 위축 때문. 엄청난 물량 공세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흥행에 성공하는 영화가 총 제작 편수의 10%에 그치고 있기 때문에 점점 영화판만 고집하기가 쉽지 않다.
예전에 비해 급등한 출연료도 톱스타들의 안방 러시를 부추긴다. 방송사들이 긴축 재정으로 출연료를 낮추겠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회당 4000만원은 물론 일부 연기자는 회당 1억원선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쯤 되면 수입도 영화보다 훨씬 낫다. 또한 연기자들의 주 수입원인 CF 출연도 드라마를 통해야 더 따내기 쉽다는 것도 한몫한다.
하지만 스타들의 복귀에 대해 장밋빛 전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 방송관계자는 “시청자들의 눈 높이가 높아진 만큼 톱스타의 이름보다 작품성으로 승부를 거는 작품들이 인기를 모으고 있다”며 “이제는 드라마의 완성도나 스토리의 탄탄함·신선감 등에 비중을 두어야 한다. 일단 스타들이 어깨에 힘을 빼야 한다”고 말했다.
톱스타 기용이 시청률 보증수표가 아니라는 점 때문에 요즘은 제작사에서 엄청나게 오른 몸값의 스타 캐스팅을 포기하는 사례도 속출하고 있다. 요즘 웬만한 스타의 편당 출연료가 2000만원선을 훌쩍 뛰어넘고 있다. 20부작 미니시리즈 한 편 제작 시 배우 한 명에게 4억원이 소요되는 현실에서 작품의 질적 하락은 불 보듯 뻔하다.
일부 배우들 작품보다 CF 촬영에만 몰두
작품수 적은 배우 실패할 때 여파 길어져
차승원이 9년 만에 안방 복귀를 노리며 올해 초부터 준비해온 드라마 <패션왕>은 여러 패션 브랜드와의 협찬 계약 불발 등의 이유로 제작이 완전 무산됐다. 차승원을 비롯해 한채영과 남규리가 출연을 확정해 12월1일 SBS에서 전파를 탈 예정이었지만 이 자리에 박예진, 이홍기 주연의 <공부의 신>이 급히 대체 편성됐다. 하지만 <공부의 신>도 제작이 무산돼 <떼루아>가 전파를 탄다.
또 <궁>의 주역인 윤은혜와 주지훈이 재회할 것으로 기대를 모은 동명의 로맨스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개인의 취향>도 기획 단계에서 제작을 철회했다.
게이 남자친구를 갖고 싶은 여자와 집을 구하기 위해 게이 행세를 하는 남자의 로맨스라는 독특한 소재를 바탕으로 <환상의 커플>의 김상호 PD가 연출을 맡아 인기 드라마의 탄생이 예상됐지만 출연료 협상 등 여러 내부 사정으로 제작이 불발됐다.
이 외에 <커피프린스 1호점> 이윤정 PD의 차기작 <트리플>은 방송사 내부 편성 전략 차원에서 내년 5월로 연기됐다.
제작사들이 드라마 제작 무산 이유로 내세우는 ‘내부 문제’는 톱스타 출연료 부담을 이겨낼 만한 수익모델을 마련하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 톱스타들이 출연한다고 해서 얼마만큼의 성적표를 내놓을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라는 점. 이로 인해 톱스타들의 몸값을 고스란히 떠안기를 방송계 또한 부담스러워 한다는 점에서 스타들의 휴가는 ‘장기화’ 되고 있다.
스타들의 휴업사태는 그들의 ‘신중한 행보’ 때문이기도 하다. 국내뿐 아니라 아시아 전역에서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두는 톱스타들인 만큼 자신의 위상을 지키기 위해서는 단순한 ‘흥미로움’만 가지고 작품에 들어갈 수는 없다는 점이 이유다.
한 방송관계자는 “톱스타들이 드라마 복귀에 망설이는 것은 그들 나름의 위치를 보장해줄 수 있는 작품을 신중하게 고르기 때문이다”라며 “특히 드라마의 경우 단지 시놉시스만 나온 상황에서 캐스팅 작업을 진행하기 때문에 작품의 완성도를 보장할 수 없다. 이로 인해 톱스타들은 대부분 16부작 미니시리즈의 절반에 해당하는 6~7회까지의 대본을 요청하고 그것이 안 될 경우에는 출연을 결정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이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일부 배우들은 작품보다 CF 촬영에만 몰두하는 경우가 많다. 작품성을 내세워 출연을 거절하고 있지만 그 내면에는 변화를 두려워하는 경우도 있다. 그 기준이 어떤 것인지 모호하다”고 칼날을 세웠다.
스타들의 몸값이 날로 치솟고 있는 가운데 어쨌든 ‘얼굴을 덜 보일수록 신선미를 유지할 수 있다’는 전략도 공백 장기화를 부채질하는 요인으로 꼽힌다. 하지만 공백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배우들에 대한 대중의 기대감은 낮아진다. 또 작품 수가 적은 배우일수록 한 작품이 실패할 때 그 여파가 오래 간다는 약점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