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가 있는 여행-대한민국 빛낸 위인의 생가 찾기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고즈넉한 ‘고택’을 찾아서

자연 한 구석에 고스란히 자리한 고택(古宅)에는 어떤 강요도 없다. 초대장이 없어도 생가는 들어서는 이들 모두를 반긴다. 잠시 머물고 둘러보는 동안 ‘됨됨이’이를 곱씹게 하는 따스함이 하나 둘 가슴으로 들어온다. 여행하기 좋은 계절, 가을에 대한민국을 빛낸 위인들의 생가를 찾아 잔잔한 감동과 교육이 충만한 여행을 해보는 건 어떨까?

서늘한 바람 솔솔, 10월에 떠나는 과거로의 시간여행
잔잔한 감동과 아이들 교육에도 좋은 위인들의 생가


영원한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 생가
영원한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 조선 제26대 고종 황제의 비로 뛰어난 외교력으로 자주성을 지키면서 개방과 개혁 정책을 추진했던 인물이다. 1895년 양력 10월8일 새벽 을미사변으로 일본인들에 의해 시해당하여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친 비운의 국모 명성황후가 출생해 8세까지 살던 집이다.
1687년(숙종 13년) 인현왕후의 아버지인 민유중의 묘막으로 건립되었는데 당시 건물로 남아있는 것은 안채뿐이었으나, 1995년에 행랑채와 사랑채, 별당채 등이 복원됨으로써 면모가 일신되었다.
집의 구조를 보면 넓은 바깥마당에서 대문을 지나 ㅡ자형 행랑채가 있고, 중문과 사랑이 붙은 ㄱ자형 문간채와 안채가 안마당을 둘러싸고 ㅁ자형을 이루며, 그 옆으로 독립된 ㅡ자형 별당이 있다. 안채는 14칸짜리 민도리집이고 8칸짜리 팔작지붕인 본채 한쪽에 6칸짜리 맞배지붕 날개채가 붙어 ㄱ자형을 이룬다. 본채는 전면에 툇간이 있는 5량구조이며, 날개채는 3량구조로 이루어졌다.



조선말 선비 가옥의 진수 가람 이병기 생가
이 집은 국문학자이며 시조 작가인 가람 이병기(1891~ 1968년) 선생이 태어나 살던 곳이다. 조선 말기 선비의 가옥 배치를 따르고 있는데 안채, 사랑채, 헛간, 고방채, 정자 등이 남아 있다. 소박한 안채와 사랑채, 아담한 정자와 연못에서 선비 가옥의 면모를 잘 살필 수 있다.
슬기를 감추고 겉으로 어리석은 체 한다는 뜻을 간직한 ‘수우재(守遇齋)’라는 사랑채 이름에서,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며 평생을 지조 있는 선비로 살아온 그의 풍취가 은은하게 느껴진다.
가람 선생은 우리 한글의 소중함을 깊이 인식하여 일찍이 1930년대부터 조선어문연구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으며, 1930년에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위원과 ‘선어 표준어’ 사정위원이 되어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경남도 흥원경찰서로 끌려가 1년간 옥고를 치른 뒤 고향에 내려와 칩거하였다. 한편, 해방후에는 전북대학교, 서울대학교, 중앙대학교 등에서 국문학을 가르쳤다. 주요 저서로 <국문학전사> <역대시조선> <가람문선> 등이 있다.



진영 봉하마을과 고 노무현 대통령 생가
경남 진영 봉하마을은 진영읍내에서 동부쪽으로 4.5km 떨어진 봉화산(해발 140m) 아래에 위치하고 있으며 진영단감과 벼농사를 주로 하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봉화산 봉수대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봉하(烽下)마을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봉화산에는 봉화사란 절과 옛날에 도둑이 많이 나왔다고 하여 붙여진 도둑돌(봉화산 동쪽)과 여우가 엎드려서 꼬리를 돌아본다하여 복고고미형의 야시골(봉화산 서쪽)이란 두개의 유명한 골짜기가 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의 생가는 작은 방 2개와 부엌이 일렬로 늘어선 슬레이트 지붕의 벽돌집이다. 초라한 집이지만 방문객들에게 이곳의 모든 것은 진귀하다. 흙·돌·물 등은 방문객들의 최고 인기품이다. 방문객 중 일부는 마당의 돌멩이와 흙을 비닐봉지에 담아가기도 한다. 또 대통령을 배출한 곳의 물은 특별하다는 생각에 물을 떠가는 사람들도 있다.



역사상 실존 민중영웅 홍길동 생가 
홍길동은 한국인을 대표하는 민중영웅이다. 역사상의 실존인물이며 허구적 소설의 주인공이다. 역사에서는 반역자 또는 강도로 기록되어 있으나, 소설에서는 봉건제도에 맞서 만민평등의 이념으로 활빈당을 이끌고, 이상국인 일본 오끼나와의 율도국을 건설한 인물이다.
역사상 홍길동은 조선 초 15세기 중엽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났으나 신분이 첩의 자식이라 관리등용을 제한하는 국법 때문에 출세의 길이 막혔다. 좌절과 울분 속에서 출가하여 양반으로부터 차별받던 소외된 민중을 규합하여 활빈당을 결성한 후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실천적 삶을 살았다. 그러나 봉건적 조선왕조의 핍박을 받던 중 관군에 체포되어 남해로 유배되었으나 탈출하여 무리를 이끌고 오끼나와로 진출하였다. 그곳에서 조선에서처럼 민중을 대변하는 민권운동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동안 홍길동의 역사적 실체가 왜곡되어 왔으나, 이 문제를 바로 잡으려는 홍길동연구팀(장성군, 연세대학교 국학연구회, 전남매일, 유구대학, 오끼나와관광국, 석원도문화원)의 3년에 걸친 끈질긴 노력 끝에 그 베일에 쌓인 비밀이 밝혀졌다.
조선에서 뱃길로 3000리나 떨어진 일본 최남단의 섬 오끼나와에서 후반부 삶을 살았던 그곳에는 민권운동의 선구자 홍길동을 추모하는 기념비가 서 있다. 이러한 홍길동의 생애 전반에 걸친 학술연구의 성과가 총체적으로 정리되었으며 500여년 전의 일본과 한국간의 교류사를 조명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에 장성군은 홍길동 생가터 주변에 1만8843m²(5700여평)의 부지를 매입하였으며 생가터 발굴 작업 및 철저한 고증을 거쳐 생가를 복원하였고 2004년 5월3일 홍길동 전시관을 개관하여 새로운 관광지로 발전하고 있다.



진주 남강의 충절녀 의암 논개 생가
논개는 선조 7년(1575년 9월3일)에 전북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에서 훈장 주달문과 밀양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천품이 영리하고 자태가 아름다웠으며, 임진왜란 당시 나라가 누란지위 지경에 처하자 19세의 꽃다운 나이로 자진하여 기적에 이름을 올렸다.
나라와 부군(夫君)의 원수 왜장 게야무라 로꾸스께를 껴안고 진주 남강에 투신해 순절한 의암 주논개의 충절의 정신을 기리고자 6만6116m²(2만여평)의 부지에 50억원을 투자한 논개생가 복원사업이 2000년 9월 완료되어 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또한 생가지가 있는 지역은 덕유산, 오동제 등 주변경관이 수려하고 장안산 군립공원과 지지계곡, 동화댐을 연계한 등산코스가 열려 있어 논개 생가와 연계한 관광코스로 손색이 없으며 연중 많은 관광객과 등산객들이 찾는 곳이다.



불교 현대화 기여한 시인 월하 김달진 생가
이 집은 월하 김달진 시인이 1907년 2월4일에 태어나 자란 곳이다. 시인은 1920년 이곳 계광학교를 마친 뒤, 서울과 향리에서 수학하다 출가하여 1934년 금상산 유점사(愉岾寺)에서 득도하였고, 1939년 현 동국대학교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시인은 1929년 <문예공론>에 <잡영수곡(雜泳數曲)>을 발표하며 문단활동을 시작하였다. 1936년 서정주, 오장환 등과 함께 ‘시인부락’ 동인으로 활동하였으며, 1941년부터 광복 조국을 기다리며 북간도에 머물기도 하였다.
1945년 광복 뒤 청년문학가협회 부회장, ‘죽순’ 동인으로 서울과 대구에서 활동한 시인은 1948년 향리로 돌아와 진해중학교, 해군사관학교, 남면중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1962년부터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의 역경사업(譯經事業)에 혼신의 힘을 기울여 고승들의 문집번역 뿐만 아니라 불교저술에 힘써 불교의 현대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1940년 첫 시집 <청시(靑枾)>와 1984년 시선집 <올빼미의 노래>를 포함하여 시인이 남긴 방대한 저술은 1997년부터 <김달진전집> 열 아홉 권에 담겨 나오고 있다.
무욕과 탈속의 경지에 다다른 시인이며, 자유자재한 고승이었을 뿐 아니라 향리에 존경받는 교육자였던 시인은 1989년 6월7일 향년 82세로 세상을 떠났다.
1990년부터 ‘김달진문학상’이 서울에서 시행됐으며, 1991년에는 정부로부터 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1996년부터는 ‘김달진문학제’가 진해에서 개최되어 시인의 문학과 삶을 기리고 있다.



향수의 실개천 만날 수  있는 정지용 생가
지난 1996년에 원형대로 복원되어 관리되고 있는 정지용 생가는 충북 옥천군 구읍사거리에서 수북방향으로 청석교 건너에 위치한다. 구읍사거리에서 수북방면으로 길을 잡아 청석교를 건너면 <향수>를 새겨 놓은 시비와 생가 안내판이 있는 곳에 이르게 된다. 이곳이 정지용 생가이며, 생가 앞 청석교 아래는 여전히 <향수>의 서두를 장식하는 실개천이 흐르고 있다. 그 모습은 변한지 오래이지만 흐르는 물은 예전과 같아 맑기만 하다.
정지용 생가는 방문을 항상 열어두어 찾는 이에게 그의 아버지가 한약방을 하였음을 가구(家具)로 알리고 있다. 또한, 시선가는 곳 어디마다 정지용의 시를 걸어놓아 시를 음미할 수 있도록 배려해 놓았다.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소리 말을 달리고”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도란거리는 곳” <향수>의 시어 따라 방안에 배치된 소품 질화로와 등잔은 자연스럽게 <향수>를 다시금 음미하게 하고 있다.
정지용 생가에는 두 개의 사립문이 있다. 하나면 족할 것을 두 개씩이나 문을 낸 뜻은 방문객의 동선을 고려하여, 또는 한 개의 문으로 드나드는 번잡함을 피하기 위하여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또 생가의 원형 그대로 복원했다 하니 물레방아 쪽 사립문은 텃밭 드나드는 용도로 원래부터 있었는지도 모른다. 부엌 문 옆을 본다면 돌절구, 나무절구와 공이가 놓여있는 자리 언저리, 이곳이 정지용 생가임을 알리는 표시판을 또 하나 만날 수 있다. 이 표시판은 정지용의 모습과 함께 그의 태어난 연도, 날짜, 생가가 언제 허물어지고 다른 집이 지어졌다는 내용을 동판에 돋을새김하고 있다.



<메밀꽃 필 무렵> 저자 이효석 생가터
이효석 문화마을은 우리나라 단편문학의 백미로 일컬어지는 <메밀꽃 필 무렵>의 작품무대이며, 가산 이효석 선생이 태어나 자란 곳이다. 지난 1990년도에 문화관광부로부터 ‘전국 제1호 문화마을’로 지정되었으며 이곳 효석문화마을을 배경으로 해마다 ‘메밀꽃 필 무렵 효석문화제’가 매년 8월 말이나 9월 초에 열린다. 이효석 문화마을 안에는 이효석 생가터, 물레방앗간, 충주집, 가산공원, 이효석기념관, 메밀 향토자료관 등이 있다.
이효석 생가터는 강원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집으로 생가의 원래 모습은 초가집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큰 엄나무 두 그루가 마당을 차지하고 있는 기역자 모양으로 지어진 함석집이다.
이효석은 1907년 2월23일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창동리 273번지(현재 창동 4리 남안동 681번지)에서 아버지 이시후와 어머니 강홍경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3명의 누이(이정원, 이정순, 이계숙)와 양자로 맞은 동생(이학순)이 있었다.
이효석의 부인 이경원은 신여성으로 화가 지망생이었다. 이효석과 이경원은 2남2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차남인 영주는 1940년 세상을 떠나고 현재 1남2녀만 생존해 있다.

자료출처 : 한국관광공사 <korean.visitkore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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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성수3지구 재개발 조합 복마전

[단독] 성수3지구 재개발 조합 복마전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재개발·재건축 현장은 ‘내 집 마련’이라는 욕망의 집합체다. 사려는 사람, 팔려는 사람, 그리고 짓는 사람까지 집을 둘러싼 이해관계가 촘촘하게 얽혀 있다. 조합은 사방팔방 뻗어있는 이권을 조율하고 사업을 끝까지 이끌어야 하는 책무를 지닌다. 문제는 이 과정서 발생하는 유착과 비리 의혹이다. 주택 재개발사업은 권력의 이동에 영향을 받는다. 서울 성동구 성수동은 2007년 오세훈 서울시장 시절 성수전략정비구역으로 지정됐다. 53만㎡ 면적의 땅을 4개 지구로 나눠 재개발을 진행하다가 박원순 서울시장이 당선되면서 사업이 지체됐다. 그러다 오 시장의 취임으로 다시 궤도에 오르는 모양새다. 3조 사업 14년째 성수전략정비구역은 압구정 아파트 지구 특별계획구역을 마주 보면서 한강 조망이 가능해 재개발 수혜 단지로 주목받고 있다. 그중 성수전략정비구역 제3지구는 성동구 성수동2가 572-7번지 일대로 기존 계획안에 따르면, 부지 11만4193㎡에 1852가구 규모 단지가 들어설 예정이다. 전체 사업비는 3조원을 상회할 것으로 전망된다. 최근 성수전략정비구역 제3지구주택재개발정비사업조합(이하 제3지구 조합)이 내홍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지난해 11월 조합장이 지위를 상실한 데 이어 각종 의혹이 불거져 복마전이 따로 없는 상황이다. 특히 조합장과 정비사업관리전문업자(이하 정비업체) 간의 유착 의혹이 화두로 떠올랐다. 정비업체는 정비사업 과정서 조합의 비전문성을 보완하기 위한 전문지식을 갖춘 사업자를 말한다. 대통령령이 정한 자본‧기술인력 등의 기준을 갖춰 시·도지사에게 등록한다. 도시및주거환경정비법(이하 도정법)은 제정 당시부터 ‘정비사업전문관리업 제도’를 도입했다. 조합원의 권익을 보호하고 사업추진의 효율성을 도모한다는 취지다. 정비업체는 ▲조합 설립 및 정비사업의 동의 ▲조합 설립 인가 신청 ▲사업성 검토 및 정비사업 시행계획서 작성 ▲설계자 및 시공자 선정 ▲사업 시행 인가 신청 ▲관리처분계획 수립 등의 업무를 지원하고 대행한다. 정비사업의 A부터 Z까지 모든 업무에 관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3지구 조합은 2009년 10월 추진위원회의 승인, 2010년 5월 주민총회를 거쳐 N사를 정비업체로 선정했다. 이후 2018년 2월 조합 설립 인가를 받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제3지구 조합 내부서 문제가 제기된 부분은 14년에 걸쳐 조합 업무를 대행해 온 N사와 역시 10년 넘게 조합서 일한 전 조합장 김모씨의 유착 의혹이다. 뉴타운 후보지 정비구역으로 오세훈 시장 취임에 재시동 김 전 조합장은 2010년 추진위 총무로 선출된 후 2016년 주민총회를 통해 추진위원장으로 뽑혔다. 2018년 창립총회서 조합장으로 선출됐지만 지난해 11월 도정법 위반 혐의로 벌금 100만원이 확정돼 자격을 상실했다. 그사이 재신임 투표, 주민총회 등의 과정이 있었고 수차례에 걸쳐 법정 공방에도 휘말렸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김 전 조합장은 2016년 추진위원장으로 선출된 이후부터 지난해 말까지 ‘불사조’에 가까운 면모를 보이며 자리를 지켰다. 김 전 조합장은 창립총회(2018년)와 동시에 진행된 조합장 선거서 학력을 허위로 기재한 혐의가 인정돼 2021년 조합장 지위를 상실했다. 제3지구 조합 선거관리 규정은 ‘후보자 등록 시 제출 서류의 허위·변조·위조 등이 발견된 경우 당선을 무효로 한다’고 명시했다. 김 전 조합장은 후보자 등록 신청서에 지방 소재 ‘Y대학 졸업’이라고 기재해 제출했다. 또 Y대학 총장 명의로 된 졸업증명서를 3부 만들어 추진위원장과 조합장 후보 등록 등에 사용했다. 앞서 서울동부지검은 업무방해죄와 사문서위조죄·위조사문서행사죄 등으로 김 전 조합장에 각각 벌금 100만원과 700만원의 약식명령을 내렸다. 이후 2021년 1심 법원은 해당 약식명령 등을 근거로 ‘조합장 지위 부존재 확인’ 소송서 김 전 조합장이 조합장의 지위에 있지 않다고 판시했다. 서울시가 진행한 조합 실태점검 결과도 조합장 지위에 영향을 미쳤다. 성동구서 2022년 2월28일부터 3월11일까지 열흘간 진행한 ‘성수전략정비구역 제3지구주택재개발정비사업조합 운영실태 시·구 합동 기동점검’서 총 22건의 지적사항이 나왔다. 자금 차입 결국 사임 특히 성동구는 김 전 조합장이 총회 의결 없이 자금을 차입한 부분에 대해서는 수사를 의뢰하겠다고 밝혔다. 도정법 제45조(총회의 의결) 2항에 따르면 자금의 차입과 그 방법, 이자율과 상환방법은 총회의 의결을 거쳐야 한다. 성동구의 실태점검 결과에도 김 전 조합장은 2022년 10월 주민총회서 또다시 조합장으로 선출됐다. 하지만 총회 의결 없이 자금을 빌린 부분이 문제가 되면서 결국 조합장 자격을 잃었다. 김 전 조합장은 2022년 ▲총회 의결 없이 자금을 차입한 점 ▲자료 공개 거부 등 도정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았다. 1심 재판부는 두 혐의 모두를 인정해 벌금 300만원을 선고했지만 항소심서 자료 공개 거부 혐의가 무죄로 바뀌면서 벌금 100만원으로 줄었다. 대법원은 지난해 11월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눈여겨볼만한 부분은 돈을 빌려준 주체가 정비업체인 N사였다는 사실이다. N사는 2019년 6월과 8월, 그리고 10월 각각 2000만원, 2000만원, 1000만원 등 총 5000만원을 제3지구 조합에 무이자로 빌려 줬다. 앞서 김 전 조합장은 2019년 2월에 5000만원, 4월에 3000만원 등 8000만원을 총회 의결 없이 N사로부터 차입한 사실이 확인돼 벌금 70만원의 약식명령을 받았다. 제3지구 조합이 총회 의결 없이 N사로부터 빌린 돈의 액수는 총 1억3000만원에 이른다. 김 전 조합장의 가족 일가가 제3지구 재개발 지역의 아파트 등을 구입하는 과정서도 N사의 흔적이 등장한다. 재산 증식 내부 정보? 문제를 제기한 제3지구 조합원은 “김 전 조합장이 추진위원장, 조합장을 하던 시기에 아들과 딸, 사위 등이 재개발 지역의 아파트를 사거나 도로를 증여받은 사실이 확인됐다. 김 전 조합장의 재산이 늘어나는 과정에 조합의 내부 정보가 사용된 게 아닌가 의심스럽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2016년 전후로 김 전 조합장을 비롯한 가족 일가의 부동산이 눈에 띄게 늘었다고 덧붙였다. 김 전 조합장이 추진위원장으로 선출된 시기와 맞물린다. 김 전 조합장의 남편으로 추정되는 이모씨는 2018년 7월 성수동의 빌라 한 채를 1억9500만원에 매입했다. 등기부등본상 이씨의 주소는 김 전 조합장의 주소와 같았다. 흥미로운 대목은 2019년 1월 이 빌라가 송모씨에게 2억원에 팔렸는데 해당 인물이 정비업체 N사의 관계자라는 의혹이 제기된 점이다. 송씨는 한 달 뒤 해당 빌라를 2억1000만원에 팔았다. 김 전 조합장의 아들로 추정되는 이모씨는 2015년 1월 제3지구 재개발 지역에 위치한 아파트 한 채를 4억5750만원에 매입했다. 김 전 조합장의 아들은 현재 제3지구 조합의 대의원으로 이름이 올라있다. 김 전 조합장의 딸로 추정되는 이모씨는 2018년 11월 특정 인물로부터 성수동2가의 도로 일부를 증여받았다. 딸 이씨의 남편이자 김 전 조합장의 사위로 추정되는 김모씨는 2017년 1월 성수동2가의 한 상가 1층을 매입했다. 김씨도 제3지구 조합의 대의원 명단에 존재한다. 2018년 해당 건물에 근저당을 설정한 업체는 세입자 조사업 등을 하는 W사였다. W사의 과거 등기부등본상 주소는 제3지구 조합서 업무를 하는 법무사 사무소의 주소와 일치했다. 송사 휘말려도 계속 부활해 가족 일가 부동산 구입 의혹 제3지구 조합의 한 조합원은 “지금 드러난 것은 등기부등본을 뒤져 찾아낸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총회의 결의 없이 정비업체로부터 금전을 차입해 자신의 급여를 챙기고 가족 일가의 부동산 축재에 사용했다는 의심을 거둘 수가 없다”며 “김 전 조합장은 대법원 확정 판결로 사임하면서도 조합원에게 단 한 마디의 사과도 없이 뻔뻔함의 극치를 보였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11월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나온 직후 김 전 조합장은 “2009년부터 지금까지 14년간 성수3지구를 위해 노력해 왔고 14년간 조합 운영을 투명하고 절약하였기에 조합장 자리서 내려오며 부끄럽지 않다”는 내용의 문자를 보낸 것으로 확인됐다. 최근에는 사무실을 얻어 ‘김○○ 사랑방’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주민과 부동산 관련 정보를 주고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제3지구 조합의 또 다른 조합원은 “김 전 조합장의 나이가 70대다. 컴퓨터도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고 들었다. 그러다 보니 정비업체가 조합장을 바지사장으로 세우고 뒤에서 조합을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말이 내부에 많다”며 “N사는 한남4구역재개발조합서도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계약이 해지된 업체”라고 주장했다. <일요시사> 취재에 따르면 한남재정비촉진구역주택재개발정비사업조합(이하 한남4구역 조합)은 지난해 정기총회서 N사와의 계약 해지 안건을 통과시켰다. 조합 설립 과정서 발생한 비위, 허위 견적서 제출, 금전 편취 혐의로 사기죄 확정 등이 이유였다. 한남4구역 조합은 2011년 N사와 용역 계약을 맺고 지난해까지 조합 업무를 함께 해 왔던 것으로 파악됐다. 한남4구역 계약 해지 제3지구 조합서 불거진 의혹은 현재 성동세무서, 성동경찰서 등에서 조사가 이뤄지고 있다. 문제를 제기한 조합원은 “전 조합장과 N사는 조합을 장악하고 감시 체계가 허술한 틈을 타 끊임없이 비리를 저지르고 있다”며 “이들의 비리는 민생침해 범죄인만큼 철저한 수사로 조합원의 피해를 막아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jsjang@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전 조합장의 해명 “떳떳하다” 김모 전 조합장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울분을 쏟아냈다. 14년간 조합을 위해 일했는데 근거 없는 모함으로 자신을 괴롭히려 든다는 것이다. 김 전 조합장은 자녀를 비롯해 사위 등 가족 일가가 재개발 지역에 아파트나 건물을 산 것은 인정하면서도 결혼을 할 무렵 본인들이 구입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비업체 N사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정비업체는 재개발 사업서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곳이다. 조합장이 됐지만 업무에 서툰 부분이 있어 정비업체 대표(송모씨)에게 도와 달라고 했다”면서도 “정비업체 직원을 따로 만난 적도 없고 부정적인 일을 한 것도 없다. 나는 떳떳하다. 떳떳하기에 아직 이 동네에 살고 있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젊고 똑똑한 사람이 조합장 선거에 나와야 한다. 그런 분이 있다면 언제든 도울 것”이라며 “2010년 조합 총무로 시작해 14년 동안 조합 일을 보면서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 법원 판결로 사임하게 됐지만 조합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은 여전하다”고 강조했다. <기사 속 기사> N사 대표의 해명 “우리는 을이다” N사의 송모 대표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정비업체는 조합이 시키는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여러 차례 말했다. 정비업체가 조합장을 내세워 조합을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내부의 의견에 강한 불쾌감을 표하면서 한 말이다. 조합이 갑, 정비업체가 을이라고 강조했다. 송 대표는 총회의 의결 없이 제3지구 조합에 돈을 빌려준 이유에 대해 “(김 전 조합장이) 조합 재정 상태가 너무 열악하다고 간곡히 부탁해서 무이자로 빌려준 것인데 그게 문제가 돼서 조합장님이 지위를 잃게 된 점은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조합에 차입한 1억3000만원은 한 푼도 돌려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조합장이 사임하는 등 조합 내부가 뒤숭숭한 것 같다는 말에는 “직무대행이 조합 업무를 보고 있고 우리도 정비업체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며 “사업은 표류하지 않고 계속 진행되는 중”이라고 밝혔다. 이어 “우리 업체가 맡고있는 재개발 지역이 20여군데 정도다. 한 군데서 문제가 생기면 다른 지역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불법을 저지를 수가 없다”고 설명했다. 한남4구역 조합과의 계약 해지에 대해서는 “(한남4구역 조합) 조합장이 내가 불법적인 요구를 했다. 그걸 거절했더니 계약 해지를 한 것”이라며 “현재 민·형사상의 조치를 취한 상태다. 법으로 가려질 일”이라고 주장했다. <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