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가 최근 자서전 <동행>을 출간해 화제다. 역대 영부인 중 가장 고학력 퍼스트레이디인 이 여사는 한국 현대 정치사와 민주화 운동의 주역, 그리고 김 전 대통령의 부인으로 ‘화려한 삶’을 살아왔다. <동행>에는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 86년간의 얽히고설킨 각종 비화와 에피소드가 담겨져 있다. 이 여사의 유년시절, 김 전 대통령과의 만남, 전두환 전 대통령, 남북정상회담 등 알려지지 않은 정치적 뒷얘기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해 흥미진진하다. 이 여사는 “남편과 살아온 동행의 기록”이자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해 싸우고 희생한 분들과의 동행의 기록”이라고 밝혔다. 그의 자서전을 통해 정치권의 뒷얘기들을 공개한다.
김대중·이희호 부산서 첫 만남 “청혼 무척 정치적이고 논리적”
전두환 전 대통령과 2시간 독대 “정치하지 말라는 생각 들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와의 첫 만남은 부산에서 시작됐다. 1951년 피난지에서 열린 대한여자청년단 회식자리에서 만났던 것. 이후 면우회 모임을 계기로 자주 만남을 가졌고 이승만 대통령 개헌 소동과 ‘정치 파동’에 함께 분개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여사가 미국 유학길에 오르면서 이들의 짧은 이별은 시작됐다. 하지만 우연의 일치였던 것일까. 유학에서 돌아온 이 여사는 길을 가다 종로에서 6년 만에 김 전 대통령을 만나게 됐다.
김대중-이희호 러브스토리
이 여사는 “근처 다방에 들어가 잠깐 서로의 안부를 묻고 다시 헤어졌다”며 “풍문으로 그동안 정치에 입문했다고 들었는데 그래서인지 다소 힘들어 보였다”고 회고했다.
실제 김 전 대통령은 1960년 4월 국회의원 선거에 낙선했고 부인과 사별했다고 한다. 그나마 1961년 인제 보궐선거에서 5수 만에 당선됐지만 5·16 군사 쿠데타로 실업자가 되기도 했던 것. 5·16 군사 쿠데타로 인해 민주당 간부로서 부패와 용공 혐의로 두 차례 조사를 받기도 했다. 이 때문에 김 전 대통령의 모습을 한동안 볼 수 없었다.
그런데 3월쯤 핼쑥한 모습으로 나타난 김 전 대통령은 “그동안 아팠노라”는 짤막한 말과 함께 이 여사에게 청혼을 했다. 청혼도 무척 정치적이고 논리적이었다고.
“당신도 알고 있듯이 나는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나에게는 원대한 꿈이 있다. 그것은 이 땅에 참된 민주주의를 꽃피우고 국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것이다. 나는 당신을 필요로 하며 나와 아이들을 돌보아주기를 바란다. 당신을 사랑한다.”
남녀 간의 뜨거운 사랑보다는 서로가 공유한 꿈에 대한 신뢰가 그와 나를 동여맨 끈이 되었다고 이 여사는 소회했다.
이희호 여사는 전두환 전 대통령과 독대한 일화도 소개했다. 김 전 대통령이 ‘내란 음모죄(1980년 신군부 세력이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김 전 대통령이 정권을 잡기 위해 민중을 선동해 일으킨 봉기’로 조작된 사건)’로 구치소 생활을 하던 중이었다.
그 당시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청주로 이감된 1981년 2월부터 청주를 모두 1백13번 오르내렸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82년 2월 초 한 통의 전화가 울렸다. 당시 실세로 불리던 ‘쓰리 허(許)’ 중 허화평씨가 그 주인공이었던 것. “각하(전 전 대통령)를 뵐 의향이 있느냐”고 전했고, 이 여사는 “만나주시면 뵙지요”라고 답했다.
실제 전 전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약속장소로 나간 이 여사는 택시를 타고 6시에 박물관 서쪽 문으로 내리니 검은 차가 다가왔다고 회고한다. 빙빙 돌아서 청와대로 들어가 또 문을 통과해 내려서 작은 다리를 건너 자그마한 단독 건물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는 것. 게다가 전 전 대통령이 들어올 때는 사전교육을 받은 대로 일어났다가 탁자에 마주 앉았다고 한다.
전 전 대통령은 “이 여사 고생이 많으시지요”라고 운을 뗐고 이 여사는 “석방해주시면 감사합니다”고 전했다. 전 전 대통령은 이에 대해 “그건 나 혼자서 결정 못한다”며 “다른 사람들도 있고 해서 석방은 어렵다. 앞으로 나아질 것”이라고 답변했다.
전 전 대통령의 아들과 가족 이야기를 섞어가며 두 시간 동안 대화를 하는 동안 이 여사는 온갖 생각을 하게 됐다고 한다. 삼일절에 석방하는 조건으로 ‘정치를 하지 않는다고 약속하라’는 등이 주된 골자다.
이 여사는 전 전 대통령을 만나고 나서 희망을 걸었다고 한다. 그러나 모든 희망은 ‘도루묵’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석방할 즈음엔 머리를 기르게 한다는데 빡빡 깎아놓아 석방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던 것. 오히려 삼일절 특별사면이 아닌 20년으로 감형됐다는 소식만 접하게 됐다.
이 여사는 “기대가 크면 실망한다더니 정말 그랬다. 공연히 전 전 대통령을 만났다고 후회했다”며 “무기나 20년이나 감옥에서 정치생명이 끝나기는 마찬가지”라고 회고했다.
하지만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큰오빠가 아들의 초청을 받고 여권을 신청했지만 몇 달이 지나도록 여권을 받지 못했던 것. 그러나 전 전 대통령과 면담을 통해 큰오빠가 미국으로 가게 됐다고 한다.
전두환 전 대통령과 독대
전 전 대통령이 “우리나라가 아주 정의롭고 자유롭다”고 태연스럽게 말하자 이 여사는 “아니다”라는 반증으로 오빠 이야기를 했던 것. 이를 계기로 모처에서 다시 여권을 신청하라는 연락이 왔다고 한다.
이 여사는 전 전 대통령과의 독대를 하는 과정에서 “전 전 대통령의 유명한 입담을 나중에야 알았다. 사형을 시키려 했던 ‘수괴’의 안사람을 상대로 동네 복덕방 아저씨가 아주머니 대하듯이 일상적으로 대했다”며 “때로는 바지 자락을 올리고 다리를 긁적거리면서 편안하게 이야기했던 독특한 분”이라고 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