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탕주의’에 푹 빠진 대한민국③

대한민국이 한탕주의에 빠진 사람들로 몸살을 앓고 있다. 박봉에 쪼들리고 빚에 치여 텅 빈 통장잔고를 한방에 채워보겠다는 희망이 이들을 각종 사행성 게임에 매달리게 하고 있다. 끝 모를 경제난은 사행산업의 최대 호황기를 가져오는 결과를 낳았다. 카지노, 경마, 복권 등 종류를 가리지 않고 각종 사행산업이 크게 성장하게 된 것. 이들이 배를 불리는 동안 서민들은 도박중독과 함께 마지막 희망까지 잃어버리는 상실감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한방을 노리다 한방에 무너진 서민들의 사연을 통해 도박공화국의 실태를 조명했다.

서울에서 사업을 하는 아버지와 떨어져 지방에서 살고 있는 A양(19)은 아버지의 도박중독 때문에 가정이 휘청거린다고 호소한다. 아버지가 도박에 빠져 있다는 걸 눈치챈 것은 지난 5월. 그때는 매달 자신과 어머니에게 오던 생활비가 2개월째 끊긴 상태였다.

사업이 어려워서 어쩔 수 없다고 여기던 A양의 생각이 틀렸단 걸 알게 된 것은 친척들에게 빚 독촉 전화가 오고부터다.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보내야 한다”며 1억원에 가까운 돈을 여러 친척들에게 나눠 빌렸고 돈을 받지 못한 친척들이 A양의 어머니에게 독촉전화를 한 것.

일확천금 꿈꾸다 패가망신 빚쟁이 전락

A양의 아버지가 1억원이 넘는 돈을 날린 까닭은 강원도 카지노에 출입을 하기 시작해서다. 올해 초부터 사업이 조금씩 기울면서 자금난을 겪던 아버지는 우연한 기회에 카지노에 출입하게 됐고 게임으로 돈을 따는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잃는 돈이 커졌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사채를 빌려 쓰는 바람에 카지노를 뜨는 것은 더욱 어려워졌다. 그러다 A양의 이모, 삼촌 등 친척들에게까지 손을 벌렸고 그 돈을 갚지 못하자 돈을 빌려준 친척들이 A양의 어머니를 압박한 것이다.

A양은 “이 상황에서도 아버지는 카지노를 떠나지 못하고 일확천금을 노리고 있다”며 “한탕을 노리고 가족들마저 등진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다”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A양의 아버지처럼 많은 이들이 ‘한방’을 노리고 각종 사행성 게임에 발을 들이고 있다. 사행성 산업이 다양화되고 그 규모가 커지면서 도박에 눈길 한번 주지 않았던 사람들마저도 쉽고 가볍게 도박에 빠져들고 있어 사행성 게임으로 인한 피해자는 계속해서 늘고 있는 것이 실정이다.

이처럼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사행성 게임 중 하나는 경마다. 경마는 국가에서 합법적으로 하는 사업이기에 시작이 다른 것들보다 쉽다는 이유에서 많은 이들이 발을 넣고 있기도 하다.

한나라당 유기준 의원이 한국마사회로부터 제출 받은 습관성 도박자 치료센터인 ‘유캔센터’의 방문상담 내담자 조사 결과, 전체 9백50명 가운데 24.2%인 2백30명이 처음으로 경마를 접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별 생각 없이 시작한 경마는 많은 이들을 중독에 빠지게 만들고 또 다른 도박에 손쉽게 접근하는 길을 열어주기도 한다.

최근에는 경마장에서 수억 원을 잃은 30대가 ‘경마장에 불을 지르겠다’고 협박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경기도 안산단원경찰서는 지난 3일 한국 마사회에 협박전화를 건 혐의(협박)로 김모(36)씨를 불구속 입건했다.

경찰에 따르면 김씨는 지난 2일 오후 2시쯤 한국마사회 콜센터에 휴대전화를 걸어 “안산경마장을 불을 지르고 내 인생도 끝내겠다”고 협박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조사 결과 그는 안산시에 있는 TV경마장에서 지난 12년 동안 4억원 상당을 탕진하자 술에 취해 홧김에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유기준 의원은 “국가가 법률로 인정하는 레저스포츠가 도박 중독의 가장 커다란 원인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분명 문제”라며 “경마가 도박의 수단으로 전락해서 많은 국민들의 정신을 황폐화시키고 재산을 탕진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내국인이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카지노인 강원랜드의 이용객도 점차 늘고 있다. 지난해 상반기의 경우 강원랜드 카지노의 순 매출액은 5천1백70억원으로 지난해 상반기(3천7백12억원)보다 39.3% 증가했다. 올해도 이용객은 꾸준히 늘어 지난 9월 한 달 입장객이 7천6백여 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9백명 늘었다.


강원랜드에 출입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부작용도 심각하다. 도박빚에 쫓기다 자살하는 사람들과 돈을 잃어 강원랜드를 떠나지 못하고 노숙자로 전락하는 이른바 ‘카지노 노숙자’가 계속해서 생겨나고 있는 것.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 송훈석(무소속) 의원이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로부터 제출 받은 ‘강원랜드 실태 점검 보고서’에 따르면 강원랜드 개장 이후 모두 25명이 목숨을 끊은 것으로 나타났다. 2007년 한해에만 모두 6명이 도박빚 때문에 자살했다.

송 의원은 “집계된 25명의 경우 유서, 주변탐문 등으로 사유가 도박빚 등으로 밝혀진 사례이며 실제 자살자는 더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사감위 보고서는 밝히고 있다”고 설명했다.

카지노 노숙자도 급증하고 있다. 카지노 노숙자 수가 서울지역 노숙자의 수인 3천여명과 비슷한 2천여명 규모로 추정되고 있는 것. 그리고 이들로 인해 벌어지는 범죄도 꾸준히 늘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정선 지역의 전체 범죄에서 사기, 절도 등이 차지하는 비율은 2000년 14.3%, 2005년 27.5%, 2006년 31.5% 등으로 매년 증가하고 있다.

한탕주의의 상징인 로또 판매율도 증가하고 있다. 매년 조금씩 하락세를 보이던 로또판매율이 상승세를 타기 시작한 것. 경기불황속에서 복권판매율이 증가한다는 속설지난 9월5일 편의점 업체 세븐일레븐이 로또를 판매하고 있는 전국 1백50개 자체 점포의 로또 매출 현황을 조사한 결과, 올해 로또 판매율이 전년대비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카지노 이용객 늘면서 카지노 노숙자 2천명 육박

세븐일레븐 측은 “로또가 1게임당 2천원에서 1천원으로 낮아진 2004년 8월 이후 2005년 12.2%, 2006년 -22.6%, 2007년 -12.5%의 저조한 판매율을 나타낸 반면 물가상승이 두드러지기 시작한 올해 4월부터는 오히려 감소세가 둔화되면서 7, 8월에는 전년동월 대비 각각 4.7%, 8.9%의 증가율을 기록했다”고 설명했다.

컴퓨터 한 대만 있으면 안방에서도 손쉽게 즐길 수 있는 온라인 도박의 규모가 커진 것도 한탕주의를 부추기고 있다.

도박사이트가 우후죽순 생긴 배경에는 바다이야기 철퇴 사건이 있다. 풍선효과로 인해 단속과 법망을 교묘히 피할 수 있는 사이버공간으로 도박장이 옮겨온 것. 때문에 온라인 도박사이트는 꾸준히 늘어 지난해 12월 기준(정보통신정책연구원 조사)으로 1천6백여 개가 넘는 도박사이트가 음지에서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

온라인 도박 검거건수도 해마다 큰 폭으로 증가하는 추세다. 국회 행정안전위 소속 정갑윤 의원(한나라당)이 경찰청으로부터 제출받은 국정감사 자료에 의하면 검거건수는 2004년 64건, 2005년 2백77건이었던 것이 2006년 5천8백74건, 2007년 2천7백14건, 2008년 8월까지만 2천4백6건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실제 온라인 도박과 관련된 이들은 검거된 수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보고 있다. 적발이나 단속이 쉽지 않은 탓이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대부분의 온라인 도박사이트들이 서버를 해외에 두고 있다는 것.

이들은 국내의 법망을 피하기 위해 도박사이트 개설이 자유로운 동남아시아나 호주 등지에 서버를 두고 사이트를 운영해 설사 적발된다 하더라도 교묘하게 단속의 손길을 피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이트들은 1주일에 한 번씩 IP주소를 바꿔 단속에 혼란을 주고 있기도 하다. 사이트 운영자들 대부분이 대포통장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도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요소다.


이처럼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그 규모가 커지고 있는 사행성게임은 많은 이들을 도박중독으로 몰아넣는 결과를 낳고 있다.

이는 카지노와 경마, 경륜, 경정, 복권 등 사행산업 이용객의 절반 이상이 도박중독자라는 조사결과로도 나타난다. 한선교 의원(한나라당)이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로부터 제출받은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의 ‘사행산업 이용실태 조사분석’에 따르면 카지노 이용객의 79.3%가 당장 치료가 필요하거나 상담을 해야 하는 도박중독자인 것으로 드러났다.

사행산업감독위원회가 한국문화관광연구원에 조사 의뢰한 ‘사행산업 이용 실태조사’에 따르면 19세 이상 성인인구의 도박중독 유병율은 9.5%(문제성 도박자 2.3%, 중위험도박자 7.2%)인 3백56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성인 10명 중 1명이 도박에 중독되었거나 위험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10명 중 1명 도박중독자 치유기관 절대 부족

도박중독에서 헤어나오기 위해 상담을 받은 이들도 해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강원랜드, 한국마사회, 국민체육진흥공단 등이 운영 중인 도박중독 치료 및 예방센터를 찾은 상담자가 2004년 대비 4.3배나 증가한 것.

송훈석 의원은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에 대한 국정 감사에서 “강원랜드, 한국마사회, 국민체육진흥공단에서 각각 운영 중인 도박중독센터의 상담자가 2004년 1천8백41명에서 지난해 7천9백70명으로 급증했다”고 밝혔다.

더 큰 문제는 늘어나는 도박중독자만큼 그들을 치유할 수 있는 시설이 부족하다는 것. 현재 도박중독자들을 위한 시설의 대부분은 카지노, 경마 등 사행사업자가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온라인 도박, 불법사행게임 등에 빠진 사람들을 위한 시설은 전무후무한 것이 현실이다.


한편 정부는 사행사업 연간 매출액을 14조원 선으로 제한시키기 위해 2011년까지 단계적으로 사행산업 매출 규모를 줄일 계획이다.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는 “2007년 국내총생산(GDP) 대비 사행산업 총수익 비중 0.67%를 단계적으로 낮추어 2011년에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평균인 0.58% 수준에 맞출 예정”이라고 밝혔다.

정부는 이를 위해 사행산업 영업장 허가?승인시 위원회와 사전협의 절차를 거치도록 관련법을 추진하고 이용객의 과도한 베팅을 막기 위해 고객전용 전자카드를 도입할 계획이다. 또 경마?경륜?경정 장외발매소(매장) 운영제도를 개선하고 사행산업 광고 규제 등을 실시할 예정이다.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사분오열’ 의료계 내분 내막

‘사분오열’ 의료계 내분 내막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뚝심인가, 고집인가? 의대 정원 확대에 대한 대통령의 뜻이 확고해도 너무 확고하다. 겉으로는 유연한 대처를 언급하면서 ‘2000명’이라는 수치는 굽히지 않을 기세다. 강 대 강 대치에 나섰던 의료계는 우왕좌왕하는 모양새다. 의료계 내부의 의견을 모으는 일도 쉽지 않아 보인다. <일요시사>와 인터뷰한 지방의대 A 교수는 의과대학 정원 확대를 밀어붙이는 윤석열정부의 강경 기조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정규군은 수뇌부만 처리하면 와해되기 쉽다. 하지만 현재 의료계는 게릴라 방식으로 대응 중이다. 주동자를 찾기 어렵고 실제 주동자도 없다. 전공의, 의대생 모두 조직의 통제하에 움직이는 게 아니라 본능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 윤정부 입장에서는 협상 대상을 찾기 어려운 상황이다. 일괄 협상에 따른 일괄 타결은 어렵다고 본다.” 2월 이후 평행선만 실제 의료계는 대학의사협회(의협),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전의교협),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 대한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학생협회(의대협) 등 여러 단체가 의대 정원 확대 정책에 개별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의대 정원 확대 반대’를 큰 틀로 하되 대응 방식이나 세부적인 요구사항은 각각 다른 상황이다. A 교수의 말대로 의료계는 현재 단일협의체가 없다. 협상테이블이 마련된다 해도 앞에 대표로 나설 사람이 없는 셈이다. 과거 의정갈등이 일어났을 때 주로 의협이 나서서 의료계 입장을 전달하고 대응을 이끌었다면 현재는 각개전투를 진행하고 있다. 이미 정부는 의협의 대표성에 대해 의문을 표한 상태다. 정부는 지난 2월 말 의협 대신 ‘대표성을 갖춘 협의체’를 구성해 의대 정원 확대 등에 대해 대화하자고 의료계에 요청했다. 의협이 전체 의사들의 대표성을 띠기 어렵다는 입장을 분명히 한 것이다. 당시 주수호 의협 비상대책위원회 언론홍보위원장은 “의협 회원엔 전공의·봉직의 등 모든 직역이 포함돼있고 모든 직역이 배출한 대의원 총회 의결을 거쳐 만들어진 조직이 비대위”라며 “정부가 의협의 대표성을 부정하는 이유는 내부 분열을 조장하기 위함”이라고 반발했다. 의협은 의료법에 근거해 모든 의사가 가입하는 법정 단체지만 개원의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번 의정갈등 국면서 가장 선봉에 선 단체는 전공의가 모인 대전협이 꼽힌다. 전공의가 의대 정원 확대에 반발해 병원을 떠나는 등 집단 강경 투쟁에 나서면서 의정갈등에 불이 붙었다. 의대생은 집단 휴학으로 힘을 실었다. 유급 마지노선에 이른 대학들이 수업을 재개했지만 의대생은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집단사직에 나선 전공의가 여전히 버티고 있는 상황서 의대생의 복귀 가능성 역시 낮다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대통령실 1년 유예안 일축하면서도 ‘2000명 정원’ 논의 가능성 제시해 교육부에 따르면 지난달 31일 기준 학칙에 따른 형식적인 신청 요건을 지킨 의대생의 휴학 신청은 누적 1만242명으로 전체 의대 재학생 대비 54.5% 규모에 이른다. 의대생들의 집단 휴학과 수업 거부는 지난 2월부터 시작됐다. 대학 사이에선 이달 중순이 지나면 여름방학까지 총동원해도 유급을 막을 수 없다. 의대는 특정 수업서 3분의 1 또는 4분의 1 이상을 결석하면 낙제(F) 처리되고 F가 하나라도 나올 경우 유급이 되도록 학칙을 세워둔 곳이 많다. 전공의의 집단사직으로 병원 업무가 마비되고 일부 의료진에 업무가 과중되는 이른바 ‘의료대란’이 벌어졌다. 여기에 의대생의 집단 휴학은 의사 수급 부족 현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의료현장에 구멍이 생기면서 의사를 찾지 못해 환자가 사망하는 ‘응급실 뺑뺑이’ 사건도 일어났다. 문제는 정부의 태도다. 지난 2월6일 2025학년도 의대 입학 정원을 5058명으로 현행보다 2000명 늘리겠다고 발표한 이후부터 현재까지 요지부동 상태다. 정부는 2035년까지 1만명의 의사 인력을 확충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2006년 이후 19년 동안 동결됐던 의대 정원 확대를 예고한 것이다. 당시 보건복지부(이하 복지부)는 발표 당시 의료계와 소통한 결과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지난해 10월26일 ‘의대정원 확대 추진계획’을 발표한 이후 40개 대학으로부터 증원 수요와 교육역량에 대한 자료를 받았고 현장점검을 포함한 검증을 마쳤다고 밝혔다. 의료계를 비롯해 사회 각계각층과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했다는 점도 언급했다. 특히 정부는 의대 정원 확대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강조했다. 언론사 여론조사 등에서 의대 정원을 늘리는 문제에 대해 국민 10명 가운데 8명 이상이 ‘필요하다’고 응답한 것을 의미있게 언급했다. “흔들림 없는 의료개혁을 완수하겠다”는 정부의 입장에 국민의 응원을 지지대로 삼은 것이다. 요구 다른 의사단체 윤석열 대통령의 의지는 더 강했다. 윤 대통령은 지난 1일 ‘국민께 드리는 말씀’ 대국민담화서 “역대 정부들이 9번 싸워 9번 모두 졌고 의사들의 직역 카르텔은 더욱 공고해졌다”며 “이제는 결코 그런 실패를 반복할 여유가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2000명이라는 숫자는 정부가 꼼꼼하게 계산해 산출한 최소한의 증원 규모”라며 “이를 결정하기까지 의사단체를 비롯한 의료계와 충분하고 광범위한 논의를 거쳤다”고 설명했다. 연구 결과를 들어 그 배경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윤 대통령은 “정부는 국책연구소 등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연구된 의사 인력 수급 체계를 검토했다. 수요 측면서 저출산 고령화와 같은 인구구조의 변화, 만성질환의 증가와 같은 질병구조의 변화, 소득 증가에 따른 의료수요 변화까지 반영했다”며 “어떤 방법론이더라도 지금부터 10년 후인 2035년에는 자연 증감분을 고려하고도 최소 1만명 이상의 의사가 부족하다는 결론은 동일하다”고 말했다. 의대 정원 확대 시기에 대해서도 정부는 가차없는 태도를 보인다. 대통령실은 지난 8일, 의협이 제안한 의대 증원 1년 유예안에 대해 “정부는 그간 검토한 바 없고 앞으로도 검토할 계획도 없다”고 밝혔다. 앞서 박민수 복지부 차관이 “내부 검토는 하겠고 현재로서 수용 여부를 말씀드리기 어렵다”고 내놓은 답변서 더 강경해진 입장이다. 대통령실은 1년 유예안을 받을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면서도 “만약 의료계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근거, 그리고 통일된 의견으로 제시한다면 논의할 가능성은 열어놓고 있다”며 “열린 마음으로 임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팔짱 낀 정부 공은 의료계로 일각에서는 정부는 초지일관 원론적인 입장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현재로선 ‘2000명’이 정부와 의료계 간 대화의 장벽이 되고 있다. 정부는 2000명이라는 수치를 꿋꿋하게 고수하고 의료계는 2000명 백지화가 대화의 선결 조건이라는 뜻을 굽히지 않는 중이다. 정부든 의료계든 어느 한쪽이라도 구부려야 맞닿는 법인데 평행선만 그리는 모양새다. 이 와중에 의료계는 내분 조짐을 보이고 있다. 정부가 의료계에 요구하는 ‘통일된 의견’을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새 회장을 선출한 의협이 그 중심에 있는 상황이다. ‘강성’으로 꼽히는 임현택 의협 회장 당선인과 의협 비대위가 엇박자를 내고 있고 대전협의 박단 비대위원장도 의협 비대위와 갈등 조짐을 보이는 중이다. 현재 의협은 비대위원장과 차기 회장이 공존하는 상태다. 의협은 지난달 26일, 임 당선인을 차기 회장으로 선출했다. 임 당선인은 결선투표서 65%의 지지를 얻어 당선됐고 임기는 다음 달 1일부터다. 임 당선인의 등장으로 의협의 대정부 투쟁 수위가 올라갈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됐다. 임 당선인은 의대 정원 증원 철회를 비롯해 대통령의 사과와 책임자 파면을 요구하는 등 다른 의사단체에 비해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마찰음이 나온 건 ‘단일대오’를 구성하는 과정에서였다. 의협 비대위는 지난 7일, 기자회견서 전의교협, 대전협, 의대협 등과 함께 합동 기자회견을 이번주 안에 열겠다고 예고했다. 하지만 임 당선인이 이런 움직임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의협 비대위, 차기 회장·전공의 회장 갈등 삐걱거리는 단일대오에 대화 공전 가능성도 의협 회장직 인수위원회는 의협 비대위와 대의원회에 공문을 보내 임 당선인이 김택우 현 비대위원장 대신 의협 비대위원장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협조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는 ‘한 지붕 두 가족’ 상황의 의협 창구를 단일화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대전협 박 위원장도 의협 비대위와 불협화음을 내고 있다. 박 위원장은 자신의 SNS에 “의협 비대위 김택우 위원장, 전의교협 김창수 회장과 지속적으로 소통하고 있지만 합동 브리핑 진행에 합의한 적은 없다”고 적었다. 합동 기자회견은 일단 취소된 상태다. 박 위원장과 임 당선인의 갈등도 관심사다. 임 당선인은 지난 4일, 윤 대통령과 박 위원장의 비공개 만남에 불만을 드러냈다. 의협 비대위는 윤 대통령과 박 위원장의 만남을 ‘의미 있다’고 평가했지만 임 당선인은 SNS에 ‘내부의 적’을 운운하며 박 위원장을 강도 높게 비난하는 듯한 글을 남겼다. 박 위원장은 이 같은 보도 내용을 게시글에 공유하며 ‘유감’이라고 적었다. 전의교협은 의대 비대위에 힘을 실어주는 모양새다. 전의교협은 전국 40개 의과대학 교수협의회로 구성된 단체다. 김창수 전의교협 회장이 의협 비대위에 합류하면서 의료계 단일대오 구성이 빨라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통일된 의견을 내놓을 단일협의체 구성 속도에 따라 의정갈등의 타결 가능성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의협 비대위를 중심으로 단일대오를 구성하려던 시도가 임 당선인과 박 위원장의 행보로 삐걱거리면서 의료계 상황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처지가 됐다. 여기에 협상테이블이 마련돼 정부와 의료계의 대화가 이뤄진다 해도 합의까지 가는 데는 하 세월이 걸릴 것이라는 의견이 만만찮다. 입장차가 그만큼 첨예하다는 뜻이다. 타결까지 첩첩산중 일각에서는 정부와 의료계 모두 환자에 대한 배려는 뒷전에 두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 2월 이후 두 달 넘게 갈등이 계속되면서 환자들은 불편을 겪고 있고 일부 의료진은 업무 과중으로 그로기 상태에 빠졌다. 전공의가 떠난 병원은 매일 막대한 손해를 입고 있다. 정부와 의료계의 10번째 갈등이 어떤 결론으로 끝나느냐에 따라 의료계 지각변동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