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오전 6시 기상하는 김창식씨. 그가 향하는 곳은 일터가 아닌 집 근처 구립도서관이다. 김씨는 하루 내내 도서관에서 지낸다.
‘열공’이 목적이다. 그가 끼고 사는 책은 법전이다. “읽고 또 읽죠. 그래도 이해가 안 가면또 읽어요”라고 너스레를 떠는 김씨는 법학도가 아니다.
올해 54세인 그는 법조계와도 전혀 무관하다. 너무나도 평범한 김씨가 팔자에도 없을 법한 법공부 삼매경에 빠진 이유가 뭘까.
김창식씨는 내부고발자다. 학교 운영의 부당함에 맞서고, 윗선 비리를 정면으로 공론화 했다가 하루아침에 ‘철퇴’를 맞았다. 이후 김씨의 삶은 갈기갈기 찢어졌다.
“차별적인 대우를 참을 수 없었습니다. 세상은 속여도 양심은 속일 수 없었지요. 두 사건으로 평범했던 한 가정이 폭삭 주저앉았습니다.”
김씨가 설명한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불행의 씨앗은 표창장이었다. 1979년 2월 명문인 A대학에 입사한 김씨는 꼼꼼한 성격 탓에 늘 우수한 근무평점을 받았다. 교학실, 행정실, 기획실, 학생처 등을 두루 거치면서 엄격한 일처리로 ‘포청천’이란 별명도 붙었다.
부당혜택·휴학비리 고발
파면후 복직…다시 파면
그러던 중 김씨는 1998년 2월 학교 신축공사 때 공사비 16억원을 절감한 공로를 인정받아 이사장 표창을 수여받았다. 동료들의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했다. 이게 화근이었다. 학교 측은 통상 이사장 표창시 당사자에 대해 1호봉 특별승급 등의 혜택을 줬으나 김씨에겐 예외였다. 달랑 표창장 종이 한 장뿐이었다.
“돈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건 차별이에요. 차라리 상을 주지 말던가 말이죠.”
김씨는 2000년 10월 교육부에 청원한 결과 학교 측의 부당함이 밝혀져 정당한 권리를 찾을 수 있었다. 김씨의 ‘팽’이 시작된 것도 이때부터다.
학교 측은 2001년 1월 징계위원회를 열어 일방적으로 김씨를 파면 조치했다. 개인 임의대로 교육부에 항의해 학교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이유에서다. 김씨는 이에불복해 복직 소송을 제기, 2004년 7월까지 이어진 총 27건의 재판에서 모두 승소한 끝에 같은 해 10월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당시 주변에선 “새끼줄로 호랑이 잡았다”는 말이 나왔다.
이도 잠시. 그에게 ‘검은 유혹’이 다가왔다. 교학계장으로 복직한 김씨는 2005년 4월 말 학교 운영진으로부터 아무런 명분 없이 자신의 아들을 휴학 조치해 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아들이 중간고사에서 받은 성적을 모두 삭제하려는 음모였다. 실제 이 운영진의 아들은 개강후 단 한 번도 출석하지 않아 2005년도 1학기 중간고사에서 전과목 ‘올 F’학점을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단칼에 거절했습니다. 정상적인 휴학기간이 넘었고, 더욱이 중간고사가 끝난 상태에서 일반휴학은 허용되지 않아요. 다만 군입대가 아니라면병원 진단서를 첨부해 질병휴학을 신청해야 하는데 아무런 증빙 서류가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재량껏 은밀히 처리해 달라는 검은 청탁이었죠. 일반 학생은 꿈도 못 꿀 일이에요.”
김씨의 완강한 거부에 경영진은 또 다른 직원들을 통해 아들의 일반휴학 허가증을 급했다. 당연히 아들의 전과목 F학점 기록도 삭제됐다. 이를 뒤늦게 확인한 김씨는 참다 해 같은 해 10월 학교 이사장에게 운영진의 휴학비리를 고발했지만 돌아온 건 해고 통지서였다.
“내 회사를 고발하는 것은 상당히 힘든 결정이었습니다. 내부 비리를 털어야 회사가 바로 설 수 있다는 신념과 조직에 대한 사랑, 충성심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학교 측은 내부고발 10일 만에 직위해제 하더라고요. 명예퇴직을 종용했으나 응하지 않았습니다. 잘못한 게 없는데 어떻게 제 발로 나갑니까. 그렇게 버티다 결국 해고됐습니다.”
2006년 1월 강제해임 당한 김씨는 보름후 검찰에 휴학비리 고소와 복직 소송을 냈다.
법정공방은 쳇바퀴 돌듯 반복됐다. 김씨는 하루가 멀다 하고 법원을 들락날락했다. 지금까지 적어도 1백번 이상 법원 문턱을 넘었다는 게 그의 전언.
하지만 김씨는 그 높은 문턱을나올 땐 무지의 한계를 몸소 느껴 한숨을 길게 내쉬지 않은 적이 없다. 김씨가 다시 펜을 들고, 법전을 끼고 사는 이유다. ‘나홀로 소송’을 벌이는 그로선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빵빵한 스타 법조인들로 이뤄진 반대편 변호사 진영을 상대하려면 기초적인 법 지식 없이는 대결 자체가 불가능했다. 국선변호사가 있었지만 형식적인 도우미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수백만원에서 수천만원에 이르는 변호사 수임료를 어떻게 감당합니까. 몸으로 때우는 수밖에요. 10년 가까이 법전과 씨름한 결과 이제는 어느 정도 숙지해 ‘반 변호사’란말까지 들어요. 소장도 후딱 만들 정도죠. 이참에 아예 이 길로 나설 요량에 법무사 시험에도 응시할 생각입니다.”
그의 외로운 사투는 제빛을 내지 못했다. 무혐의, 항고, 재수사명령, 무혐의, 재항고, 각하 등으로 진행된 휴학비리 사건은 결국 마지막 보루인 헌법재판소에서 무혐의로 최종 마무리됐다. 학교 측의 손을 들어준 법원은 “휴학은 학교 자유재량”이라고 판단했다.
“법원의 판결은 학점 보완책으로 부정휴학을 제시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쓰레기 학점을 받아도 학교 재량만 얻으면 깔끔하게 청소되는 셈이죠.”
문제는 해임무효 소송. 2007년 10월 이후 4차례에 걸친 변론준비기일만 잡힌 채 감감 무소식이다.
지난 1월 4차 변론준비 종결 후 현재까지 10개월이 넘도록 답보 상태다. 김씨의 재판 기일탄원도 소용없었다. 김씨는 급기야 최근 대법원장과 담당 부장판사를 상대로 직무유기로인한 손해배상 소송까지 냈다.
“무더위에 수박 한덩이도…”
정신·경제적 고통 호소
“법원은 복직 소송에 대해 1년 넘게 ‘꿀 먹은 벙어리’마냥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그저 팔짱만 끼고 있어요. 이기든 지든 재판이 열려야 끝이 날 게 아닙니까. 설마 사건을그대로 덮으려는 속셈은 아닌지 걱정입니다. 시간이 지나니까 공방 상대방이 학교가 아니라 법원으로 바뀌더라고요.”
재판이 ‘홀딩’되면서 김씨뿐만 아니라 가족이 겪고 있는고통의 나날도 하루하루 연장되고 있다. 김씨는 가족 모두의 정신적, 경제적 고통을 호소했다.
김씨는 극도의 정신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 게 한두 번이 아니라고 하소연했다. 최근엔 안면마비 증세까지 생겼다.
김씨의 부인도 사정은 같다. 남편이 해고된 뒤 두통, 위염, 불면증, 이명현상 등의 증세로 바깥출입조차 힘겹다고 한다.
대학생인 딸은 은행에서 대출 받아 등록금을 간신히 몇 번 냈지만, 재판이 장기화되자 등록금을 감당 못해 결국 3학년 재학 중 휴학계를 냈다. 중학교 3학년인 아들은 다니던 학원을모두 끊었다. 김씨 부부에게 매일 같이 학원에 보내 달라고 조른다고 한다. 가족의 몸과마음이 갈수록 황폐화되자 김씨의 부인은 “재판을 열어 달라”는 탄원서를 법원에 제출하기도 했다.
‘하루아침에 날벼락을 맞고 재판장님의 처분만 목 빠지게 기다리며 연명하고있습니다…10여년의 고통으로 심신이 병들고 황폐해져 이제 한 끼의 식사도 힘겨운 폐인이됐습니다…부모 눈치만 보고 말을 잃어가는 아이들을 보면 가슴이 미어집니다…고기는커녕 무더위에 수박 한 덩이도 마음 놓고 먹일 수 없는 어미의 심정을 헤아려 주세요….’
김씨의 수입이 끊기면서 가정경제도 엉망진창이 됐다. 여기저기 ‘빚잔치’다. 지인들에게 ‘구걸’하다시피 꿔온 돈만 1억원이 넘는다. 한달에 고정적으로 45∼50만원이 이자 비용으로 나간다.
북한산 자락 산동네에 자리 잡은 집은 압류된 지 오래다. 각종 세금은 물론 5백여만원의 의료보험료 미납으로 매일 독촉전화가 온다. 신용카드, 예금통장 등도 채권압류로 묶여 있다. 김씨는 학교에서 근무한 27년치 퇴직금 4억원 정도가 있지만, 학교 측은“최종판결 전까지 줄 수 없다”며 지급을 미루고 있다.
“삶이 고달파요. 육신과 영혼이 황폐해질 정도로 괴롭습니다. 양심의 목소리를 냈을 뿐인데 하늘이 원망스러울 따름이에요. 가족들에게 미안한 것은 두말할 나위 없죠. ‘여기서 나까지 흔들리면 이 가정이 깨지겠구나’하는 생각에 중심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역부족입니다.”
그는 소송이 ‘투병 생활’과 같다고 정의했다. 그래서 김씨에게 “혹시 내부고발을 후회하지 않는가”란 질문을 던졌다. 그는 뜻밖에도 “후회막급”이라고 털어놨다. 이어 “직장 비리는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것이 능사인 것 같다”는 회한도 마구 쏟아냈다.
“솔직히 후회합니다. 이지경까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처참한 생활을 알았으면 내부고발은 물론 소송 시작도 안했어요. 시간이 흐를수록 수렁에 빠지는 느낌입니다. 세상이 더럽더라도 그냥 놔둘걸 그랬어요. 최소한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말이죠. 시간을 되돌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실추된 명예를 반드시 회복하겠다는 김씨의 의지는 그대로다. 자신의 말이 옳다는 것을 복직을 통해 증명하겠다는 각오다.
“시작을 했으니 끝을 봐야죠. 내년엔 끝나겠죠. 하여튼 하루 빨리 법원과의 악연을 끊고 싶을 뿐입니다.”
27년 퇴직금 4억원 묶여
“최종 판결 전까지는…”
김씨는 지금도 어디선가 내부 고발의 병폐를 알리고자 외로운 투쟁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고통을 호소하는 그의 눈물은 거대한 장막 뒤에 가려져 점점 메마르고 있다.
“법원이 작은 소리에도 귀를 기울였다면 한 가족의 인생이 이렇게 휴지통에 버려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한 맺힌 외침이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 공허한메아리로 그치지나 않을지 걱정입니다.” 그리고 그는 단언했다. “참된 목소리가 보복을 당해도 구제를 요청할 곳은 대한민국엔 없다”고.
사진=송원제 기자
<보호책은?>
“보복, 대책 없다!”
내부고발자 보호책은 갖춰져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공익제보자를 보호할 만한 제도적장치는 미흡한 형편이다.
현행 부패방지법에 따르면 보호 가능한 내부고발자를 공직자와 공공기관이 관계된 부패행위 제보자로 제한하고 있다. 민간부문인 경우 원상회복 등을 강제할 수 없고 권고 외에는 취할 수 있는 조치가 없다. 결국 공익제보자가 보복 징계를 당해도 구제를 요청할 곳이 없는 셈이다. 예외적으로 국가청렴위원회에 신고된 경우에만 민간영역의 내부고발자가 보호받을 수 있는 길이 있지만, 위원회가 독자적인 조사권이 없어이 역시 미흡하긴 마찬가지다.
법조계 전관예우 <실태>
1~20위 변호사 90% 최종 근무지 개업
법원장 출신 1년내 최종 근무지 사건 수임
법조계의 ‘전관예우’문제가 또다시 도마에올랐다.
지난 19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우윤근(민주당) 의원이 법무부로부터 제출받아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2007년 하반기 형사사건 수임 건수에서 1∼20위를 차지한 변호사 중 17명이 자신의 최종 근무지에서 개업한 것으로 드러났다.
1위를 기록한 조모 변호사는 대전지검에서 퇴임한 뒤 대전에서 개업해 하반기에만 64건을 수임했다. 2·3위인 김모·이모 변호사는 인천지법에서 옷을 벗고 인천에서 개업, 각각 62건과 57건의 사건을 수임했다. 7~20위에 오른 변호사 역시 모두 최종 근무지에서 개업해 35~48건의 사건을 맡았다.
이날 참여연대도 비슷한 결과를 발표했다.
참여연대가 2004∼2007년 퇴임한 법원장 출신 변호사들의 사건수임 실태를 조사해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이 기간 퇴임해 개업한 고등법원장 7명과 지방법원장 13명 모두 퇴임일로부터 1년 이내에 최종 근무했던 법원의 사건을 수임했다. 이들 법관이 맡은 사건은 판결문 등을 통해 확인된 것만 모두 2백10건으로 이중 형사사건이 1백55건(73.8%)에 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