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장과 자원봉사자를 넘나드는최대호씨



세상이 흉흉하다. 한 학교 교장선생님이 만취해 휴대전화로 여고생의 허벅지 사진을 찍는가 하면 초등학생들에게 성추행을 가하는 교사도 있다. 그렇다 보니 교사를 비롯해 학원 강사 등 ‘선생님’에 대한 이미지는 예전만 못하다. 하지만 아직 세상은 훈훈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이가 있다. 학원장이자 자원봉사자로 살아가고 있는 최대호씨같은 이들이 있어서다. 지난 15일, 최씨를 만나기 위해 기자는 경기 안양시 호계동을 찾았다. 최씨가 운영하는 학원은 총 두 건물로 이뤄져 있었다. 자칫 외양만 보면 경제력을 갖춘 학원장이 호기롭게 자원봉사를 한다는 선입견을 가질 소지도 있었다. 하지만 최씨가 학원장이란 얼굴 이면에서 묵묵히 자원봉사를 하며 사는 것처럼 큰 현대식 학원 건물 안에 자기 삶에 떳떳한 최씨가 있을 것을 생각하니 공연히 마음이 뿌듯해져 왔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기자를 맞은 최씨에게선 기자가 상상한 그대로 사람냄새가 담뿍 묻어났다.

“누군가의 얼굴에 웃음꽃 피어날 때 가장 행복”

최씨는 1996년부터 안양에서 학원을 운영해왔다. 아무래도 학교 교사보다는 사회적 명예가 덜했지만 학생들을 교육하고 이끈다는 사명감 하에 나름의 보람을 느끼며 살아왔고, 그 일념으로 IMF도 넘겼다. 하지만 사회의 부정적인 시각은 학원 선생님들과 아무리 똘똘 뭉쳐도 해결할 수 없는 산이었다. IMF보다 더 무서운 것이 바로 ‘학원 운영이 사교육을 증대시켜 학교의 기강을 무너뜨리고 가정의 경제를 휘청이게 한다’는 편견이었다.

일정한 기회 주고 싶어
소년소녀가장 돕기 시작
“‘개천에서 용난다’라는 말이 있지만 요즘은 아니잖아요.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면 부에서도 대물림 현상이 일어납니다. 예전에는 어려운 형편에서도 판사, 의사가 나올 수 있었지만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갈수록 심해지는 요즘으로선 경제력이 없는 가정에서 용나는 일이 더욱 더 어렵기만 합니다. 이런 상황들을 지켜보고 절감하면서 가난과 교육 부재의 대물림을 재현시키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소외된 학생들을 생각하게 됐고, 이들에게도 일정한 기회를 주고 싶었죠. 그래서 불우 장학생 및 소년소녀가장 돕기 등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특히 2005년 저출산 문제로 사회가 떠들썩하던 당시 교육비가 워낙 높아 아이들을 낳지 않겠다는 말들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셋째 아이들에게 무료로 교육을 지원하는 ‘무료 교육 시스템’을 도입했습니다. 총 2백 42가정이 지원했지만 모두를 지원해줄 여건이 되지 않아 가정환경이 어려운 아이들 위주로 1백1명을 선정해 지원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모두를 지원해 주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현실이 너무도 안타까웠죠.”
자신이 운영하는 학원 내에서 실시한 시스템이었기에 사재(私財)를 털어 봉사한 것이지만 더 도와줄 수 없었던 현실이 안타까웠다는 최씨. 하지만 그가 그토록 안타까워하며 겨우겨우 선정해 낸 1백1명의 학생들은 큰 도움을 받았다. 비록 한 달 학원비 25만원씩을 지원해주는 것이었지만 연 3백억원에 달하는 지원금이 가정환경이 어려워 꿈을 포기할 수도 있었던 아이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었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학원이니 강의 한 번 더하는 격일 것이라 쉽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지만 비영리가 아닌 영리 단체로서 강사를 고용하고, 큰 학원을 운영해 나가야 하는 운영자의 입장에서는 큰 결심이 아닐 수 없다.

“교육에는 때가 있다”는 생각 하에 가정 어려운 아이들 학원비 무료지원
편견의 눈초리, “가난하다” 속이는 이들 속에서도 꿋꿋하게 봉사활동 할 것
난치병 환자 돕기 운동·사랑의 집짓기 등 다양한 봉사활동 통해 행복 느껴
“나보다 어려운 사람과 함께 하겠다”는 인생철학, 성실함으로 걸어가는 길

하지만 최씨는 오히려 아이들의 교육을 지원하면서 30년 전 자신의 모습을 투영할 수 있었고, “정말 이 일 하기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제가 지원했던 1백1명 중 기억에 남는 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은행을 다니다 IMF로 실직하고 그후 재기하기 위해 사업을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그 아이가 무척이나 똑똑했다는 겁니다.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폭넓게 주어지지 못해 가슴앓이를 했을 정도라고 하니까요. 마치 30~40년 전의 저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했던 기억이 오롯이 되살아나더군요. 교육에는 때가 있습니다. 공부에는 때가 없다고 하지만 이때를 놓치게 되면 훨씬 어려운 길이 될 수밖에 없고, 또 무의미해지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를 도와주고 싶었고, 제가 도와줄 수 있었을 땐 정말 가슴이 뭉클했어요.”
이뿐 아니다. 최씨가 실시한 ‘무료 교육 시스템’ 덕분에 ‘교육의 때’를 놓치지 않아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고, 대학에 진학한 아이들도 많다. 그중 한 아이는 얼마 전 만났는데 군 복무 중 휴가를 나와 최씨를 찾아왔다고 한다. “그런 아이들을 볼 때마다 너무도 행복합니다”라며 최씨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지만 늘 그렇듯 좋은 일에도 사회의 부정적인 인식이 뒤따랐다. ‘무료 교육 시스템’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사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하는 제스처”라는 맹목적인 비난의 시선도 있었다. 이에 대해 최씨는 “그런 목적은 절대 있을 수도 없고, ‘선행은 선행일 뿐’이라는 생각밖에는 없었다”며 “목적을 악용하거나 보상받기를 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못을 박았다.

어린 시절 기억 투영한
아이 도와줄 때 뿌듯해
오히려 최씨의 순수한 목적을 악용하는 이들이 있다. 학원비를 내지 않기 위해 “가난하다”고 사칭하는 학부모들이 종종 있다는 것. 하지만 최씨는 “어쩔 수 없다. 각자의 양심의 문제다”라고 말한다. 무조건 순수한 마음에서 이뤄지는 무료 교육이기에 무료 교육을 원하는 이들이 최대한 양심적이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상의 가시 박힌 시선 속에서도 최씨는 굴하지 않고 ‘무료 교육 시스템’을 더욱 확산해나가고 싶다는 포부를 밝힌다.
“기회를 놓친 아이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고 싶은데 여러 여건 때문에 생각처럼 되지가 않네요. 또 다른 학원들도 같은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되는데 그렇지 않은 곳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래서 폭을 넓히는 의미에서 진짜 어려운 학생 100% 무료, 그렇지 않은 학생 50%, 교육이 어려운 학생 30% 무료 등으로 해줄 생각입니다. 그 기준을 잡기에 모호한 부분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최대한 공정하게 해서 더 많은 이들에게 무료교육을 실시해주고 싶습니다.”
최씨의 나눔운동은 단지 학원 내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지난 2001년부터 난치병 환자 돕기 운동 본부에서 해마다 60~70명의 아이들을 도와왔으며, 사랑나눔연대 등에서 지원하는 사랑의 집짓기 운동도 하고 있는 것. 올해 4~6월까지 최씨의 손으로 수리해 준 가구만도 20~25가구나 된다. 여기에 날이 추워지기 전인 “9~10월 사이에 20~25가구를 더 수리하고 싶다”고 말하는 최씨에게 절로 탄복이 난다.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여건을 만들어주는 일입니다. 전 그저 조용히 후원을 하고 집짓기 등을 하며 동참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 과정에서 굉장히 어려운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또다시 느꼈습니다. 대부분 지하셋방 습기가 가득한 곳에서 사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순수 도배 및 페인트칠, 싱크대 교체, 전기 수리 등의 일을 했지요. 매주 목·금·토에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데 마음 같아서는 매일 참석하고 싶죠. 그래도 일이 있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참석하는 것을 철칙으로 하고 시간이 비는 대로 참석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봉사활동…
행복한 “나의 천직”
최씨가 동참한 사랑의 집짓기 운동은 동사무소 및 복지기관의 신청을 받아 집수리가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을 위주로 행해진다. 그러나 보증금 2백~3백만원에 월세를 내고 사는 이들이 대부분이라 집주인의 완강한 거부로 위기에 봉착할 때가 많다. 겨우 집수리를 해도 수리를 했다는 이유로 집주인들이 세입자를 내보내는 일이 많아 가슴이 아프다고 최씨는 전한다.
“남의 일이 아닌 것 같아 최대한 집주인들을 설득하고 있습니다. 특히 반지하는 대부분 냄새가 심하고 암흑천지인 곳이 많습니다. 게다가 노인층이 많아요. 그래서 도배만 해도 새집처럼 변하거든요. 홀로 사는 할머니에게 농담처럼 ‘신혼방처럼 꾸몄으니 할아버지만 있으면 되겠다’고 말하면 웃으시는데 그럴 땐 제가 웃음을 되찾아드린 것 같아 행복합니다. 집짓기 운동을 통해 조그만 관심과 사랑만 나눠도 큰 행복감을 느낀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평생 이 일을 할 생각이에요.”
최씨의 인생철학은 ‘나보다 어려운 사람과 함께하겠다’는 것이다. 최씨 역시 살아오는 동안 고난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성실’하면 언행일치가 가능하고, 인정받고 성공하길 원한다면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면 된다”며 좌절하지도, 주저하지도 않는다.  
인터뷰 내내 한사코 자신이 하는 일은 큰일이 아니라고 겸손함을 보이는 최씨였다. 하지만 그럴수록 자신의 편안한 현실에 안주하기보다 그 현실을 쪼개 조금이라도 남과 함께 나누려는 최씨에게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다른 이들과 함께 웃음을 나눌 때 가장 행복하다는 최씨는 마지막까지 향기가 폴폴 나는 한마디를 했다.
“앞으로도 봉사활동은 계속할 생각입니다. 저의 조그마한 손길로 인해 어렵고 힘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언제든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후원할 거예요.”  
늦가을, 봄꽃향기처럼 홀연 최씨의 사람향기가 퍼져나간다.

글 박형남·사진 송원제 기자 /hih1220@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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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채 상병 사건’ 사단장 수상한 메시지 내막

[단독] ‘채 상병 사건’ 사단장 수상한 메시지 내막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김철준 기자 = ‘채 상병 사건’의 핵심 관계자인 임성근 전 해병대 제1사단장이 해병대 간부들에게 여러 차례 연락을 취한 것으로 파악됐다. 자신의 사건을 언급하면서 사실관계를 확인하려 한 게 핵심이다. 임 전 사단장과 연락이 닿은 인물들은 대부분 이해관계자다. 자칫하면 회유 정황으로 보일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임성근 전 해병대 제1사단장은 ‘채 상병 사건’의 핵심 피의자다. 수사외압 논란의 시발점이자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이 직접 챙긴 인물이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의 수사 대상인 임 전 사단장은 자신의 사건을 물밑에서 알아보기 시작했다. 시종일관 침묵을 지키다 왜 움직이기 시작했을까? 침묵 지키다… 임 전 사단장은 최근까지 복수의 해병대 간부들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는 간부 A씨에게 “(공수처)수사가 종결되지 않은 상황서 괜한 오해를 살 수 있어서 연락하지 못했다”며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미안하다”는 사과의 말은 없었다. 다만 “모두가 상상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었고, 현재도 겪고 있지만 아들을 잃은 채 상병의 유족 특히 모친의 고통을 생각하면서 버티고 있다. 진실을 밝힐 때까지는 고통스러워도 견딜 생각이다. 후배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은 다 하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고 전했다. 임 전 사단장은 A씨에게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이하 대령)의 변호인이었던 김경호 변호사에게 내용증명을 보낸 것과 관련해 민·형사 소송을 준비 중이라며 도움을 요청하는 뉘앙스로 연락을 취했다. 김 변호사가 자신을 고발한 게 무고에 해당하는지와 사실관계 확인을 요청한 것이다. 그는 타 간부들에게도 비슷한 도움을 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 간부는 <일요시사>와의 연락서 “난감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모셨던 사람이긴 한데 임 전 사단장에 대해 개개인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모든 사람이 채 상병 사건 진상규명을 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임 전 사단장은 과거 박 대령에게도 사실확인요청서를 보낸 바 있다. 자신은 물속 수색을 하지 말라는 지시를 수차례 했고 작전통제권이 육군 50사단장으로 넘어간 상황서 자신의 책임과 범위 내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했다며, 이에 대한 박 대령의 기억과 판단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공수처 수사 대상인데… 사건 연루자들에 연락 당시 임 전 사단장은 “상급지휘관(임 전 사단장)에게 작전통제권은 없지만, 부대를 방문해 전술토의할 수 있고 효율적인 작전이 되도록 유도할 권한은 있다”고 했다. 작전통제권이 없어 안전 책무가 없다면서도, 자신이 현장서 ‘수변을 수색하라’고 지휘한 건 직권남용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취지다. 이런 이유로 임 전 사단장은 자신의 직권남용 문제를 언급한 해병대수사단의 조사 결과 보고서가 잘못됐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해병대 수사단은 임 전 사단장의 직권남용 혐의를 적시하지 않았다. 수사단은 ‘작전통제권과 상관 없이’ 임 전 사단장을 실질적 수색작전 지휘관으로 보고, 안전지침을 부대에 하달하지 않아 채 상병 순직사고가 일어났다고 판단했다. 임 전 사단장은 김 변호사와 공방전을 벌이고 있다. 법적 대응까지 예고했다. 김 변호사가 SNS에 게시한 글 중 허위 사실이 포함된 내용이 있다는 게 임 전 사단장의 주장이다. 그는 김 변호사에게 “해병대 수사단 자료의 한계 속에서 해석과 이해를 거쳐 어떤 주장을 하는 것에 관해서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에도 같은 주장을 반복하는 것은 악의적이라고 생각한다”며 “해병대 수사단 자료의 문제점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발견됐고, 제가 사안의 진상을 밝히면서 그걸 뒷받침하는 자료를 제시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허위가 여론을 조작하고 진실을 가리는 불의한 상황을 시정하기 위해 나 자신의 안위는 돌보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강조했다. 김 변호사는 임 전 사단장을 공수처에 세 번째로 고발했다. 이번 혐의는 군형법 제79조 무단이탈죄다. 군인권센터에 따르면, 임 전 사단장은 지난 1월 말 서울 노원구에 있는 화랑대연구소가 아닌 영등포구에 위치한 해군 관사 ‘바다마을아파트’에 거주하며 인접한 해군 재경근무지원대대 사무실로 출근 중이다. 마음 급해졌나…어떤 의도? 갑자기? 특검 압박 느꼈나 이 사실은 그가 여러 곳에 자신이 결백하다는 취지의 문서를 내용증명, 등기우편 등으로 보내면서 드러났다. 등기 봉투의 발신지는 화랑대연구소였으나 배송 조회 결과 실제 발신지는 서울 신길7동 우편취급국이었다. 임 전 사단장이 거주 중인 서울 관사 인근이다. 발송 시간도 대부분 일과시간 직전이나 일과 중이었다. 임 전 사단장은 언론을 통해 “연수 초기에 육사에서 주로 근무했으나 장거리 출퇴근 비효율적이라서 최근엔 해군재경대대서 근무 중이다. 근무 장소 중 하나가 해군 재경대대”라고 해명했다. 이에 대해 김 변호사는 “정책 연수의 일시와 출퇴근 시간 및 장소가 명령으로 특정된다. 인사명령의 지정된 장소서 지정된 출퇴근 시간을 준수해야 한다”며,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 인사명령이나 상급기관의 지휘관에게 사전에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최근 자주 번호를 변경하는 임 전 사단장의 핸드폰을 압수수색해 무단이탈한 장소와 상급지휘관인 해병대 사령관에게 정식으로 사전에 허가를 받았는지에 관한 진실을 밝혀 강력히 처벌해 달라는 취지”라고 전했다. 김 변호사는 “임 전 사단장이 해병대 간부들에게 연락을 취하는 행동이 증거인멸 시도로 볼 수 있다”며 “자신의 책임을 부정하기 위해 메시지를 보내며 같이 책임을 면하자는 회유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공수처는 지난 1월부터 해병대 수사단의 조사 결과와 경찰 이첩 과정서 외압이 있었는지에 대해 강제수사를 착수해 왔다. 박 대령에게 사실확인요청서를 보낸 것에서 임 전 사단장이 적극적인 책임 회피에 나섰다는 분석도 제기됐다. 현재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정치권서 ‘채 상병 특검’ 목소리가 커지자 조용했던 임 전 사단장이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관측이 나온다. 부적절한 처신 한 해병대 간부는 “전우의 죽음 이후 형평성에 어긋나거나 석연치 않은 윗선의 처리는 진상규명 문제를 떠나 정치권 개입을 불렀다”며 “도의적 책임도 지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일부 작자들의 행동으로 인해 해병대 전체의 명예가 실추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임 전 사단장은 <일요시사>가 사건 관계인에 연락한 이유에 관해 묻자 "사건 관계인에게 연락한 것은 사실 확인을 위한 것일 뿐"이라고 답했다. <hounder@ilyosisa.co.kr>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