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의 비밀

68년 만에 보물창고 열리다

[일요시사 취재1팀] 신상미 기자 = 서울 용산에 위치한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엔 한반도뿐 아니라 중국, 일본, 대만, 몽골, 시베리아, 중앙아시아의 유물까지 약 38만여점의 소장품이 보관돼 있다. 지난 1945년 박물관이 문을 열었으나 수장고 속 유물의 전모가 완전히 파악된 것은 아니다. 특히 일제강점기 일본인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일제 수집 유물’을 광복 후 68년 만에 처음으로 조사하면서 역사적 중요성이 큰 유물이 여러 차례 발견돼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일제 수집 유물은 유적보고서와 도면 등의 공문서, 유리 건판을 제외하고도 발굴품만 ‘16만점’에 달하는 방대한 양이다. 워낙에 양이 많고 인력과 예산이 부족하다 보니 해방 후 68년이 지나도록 학계에선 해당 발굴품이 어떤 성격의 유물들이고 어디서 어떻게 출토됐는지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16만점 발굴
지금도 연구

그러던 중 지난 2013년 1월, 해방 후 처음으로 국립중앙박물관(이하 국박)은 일제 수집 유물을 조사해 복원 계획을 발표했다. 당시 국박은 2022년까지 향후 10년에 걸쳐 연 5억원씩 총 50억원을 투입하는 초대형 프로젝트라고 강조했다. 일제 수집 유물 조사 프로젝트가 올해로 4년째에 접어들면서 금관총 ‘이사지왕’ 명문 환두대도(손잡이 끝부분에 둥근 고리가 있는 칼)를 비롯해 학계 안팎을 들썩이게 했던 ‘역사적 발견’이 몇 차례 있었다. 학계에선 국박 수장고에서 앞으로도 이러한 큰 발견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한 고고학자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유물들이 국박 수장고에 그대로 잠자고 있다”면서 “해방 후에 일본인들이 가져가지 못하고 거의 그대로 남았다. 국박에서 지난 몇 년간 수장고를 발굴한다는 개념으로 일제 수집 유물을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국박은 1945년 개관하면서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소장품을 고스란히 인수받았다. 이후 6·25전쟁 때 부산 피란 등 7차례나 이사를 다니다 지난 2005년 처음으로 박물관 만을 위한 공간을 건립해 서울 용산에 둥지를 틀었다.


1960년대 이후 경제개발을 최우선으로 하는 ‘성장 이데올로기’가 전 사회를 지배했고, 발굴조사는 개발공사를 앞두고 시행하는 ‘구제발굴’에만 머물렀다. 건축·토목공사를 위해 급하게 매장문화재를 발굴·수습하는 조사가 주를 이루다 보니 전국 각급 박물관이 땅 속에서 나온 발굴품을 보관할 수장고마저 부족한 실정이다.

일제 수집 유물 자체가 36년에 걸쳐 축적된 방대한 자료인데다 발굴조사와 수집과정에서 한국인이 철저히 배제된 점, 일본인 고고학자들이 제대로 된 보고서를 거의 남기지 않은 점, 지하수장고에 맥락 없이 마구잡이로 방치돼 있었던 점 등이 일사정연하게 정리해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어렵게 했다.    

정부의 인식 부족으로 인한 예산 및 인력이 부족한 것도 원인이다. 지난 수십년간 발굴·보존 예산 등이 꾸준히 증가해 왔으나 전국의 국·공립박물관에서 긴급한 보존처리를 기다리는 유물들만 수십만점에 이른다.

이 같은 이유들로 일제 수집 유물은 조사 및 복원처리에서 우선 순위에 밀렸으나 10여년 전부터 학계를 중심으로 학회와 각종 소모임을 열고 논문을 발표하면서 서서히 연구가 진행되다 일제 수집 유물의 중요성이 공유된 끝에 정부로부터 예산을 받아 조사를 진행할 수 있게 됐다.

국내뿐 아니라 여러나라 유물까지 소장
일제 수집품 프로젝트 4년째 큰 발견도

16만점에 이르는 해당 유물(주로 고분 부장품) 중 최초의 중요한 발견은 칼자루에 이사지왕(爾斯智王)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둥근 고리 검이다. 해당 유물은 1921년 일제강점기에 실시된 금관총 발굴 중 나온 부장품 중 하나로, 지난 70년간 국박 수장고에서 햇빛을 보지 못한 채 잠자고 있었다.

2013년 7월, 이 환두대도가 발견된 후 학계에선 금관총의 주인이 이사지왕일 것이라는 의견이 유력하게 제시됐다. 현재까지 무덤 주인이 특정된 고대고분은 ‘무령왕릉’이 유일하다. 환두대도의 발견은 금관총의 재발굴을 이끌어냈다. 지난해 재발굴을 실시하면서 이사지왕 명문이 새겨진 칼집이 또다시 출토되면서 화제가 됐다.        


백제 무왕부부(서동과 선화공주)가 묻혔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익산 쌍릉도 새롭게 주목받았다. 국박 측은 먼저 유리 건판 사진 속에서 쌍릉의 나무널(木棺)을 꾸미는 밑동쇠(座金具)와 꾸미개를 발견하고 해당 유물이 실제로 국박 수장고 안에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최근 무덤 주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치아 4점을 국립전주박물관 수장고에서 발견하고 DNA 분석을 의뢰한 결과, 성인 여성의 것으로 확인되면서 무덤 주인공이 선화공주일 가능성이 제기된 바 있다.   

1926년 조선총독부박물관에서 조사를 진행한 경주 서봉총 출토 유물도 국박 수장고에 보관돼 있었다. 하지만 최근 조사과정에서 ‘X자형 무늬 금반지’ 2점과 ‘가는 고리 귀고리’ 5점 등 9점이 분실된 것이 밝혀졌다. 1931년에 촬영한 출토 유물 사진에서 확인된 유물을 현 수장고에선 찾을 수 없었다. 박물관 측은 여러 정황상 일제강점기 때 도난당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국박은 서봉총 발굴보고서를 발간하고 마찬가지로 오는 10월까지 재발굴하기로 했다. 

속속 드러난
국보급 보물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반출된 것으로 알려졌던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현묘탑(국보 제101호) 사자상도 국박 수장고에 지난 60년간 보존돼 있었던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기도 했다. 당시 문화재 관리 주무당국인 문화재청과 국박 사이에 협업체계가 원활하지 못하다는 비판이 일제히 일었으나 그만큼 국박 수장고에 알려지지 않은 발굴과 발견이 많을 수 있다는 가능성도 열려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흥선대원군에 의해 불타 없어진 것으로 알려졌던 대동여지도 목판 원판(진품) 11장이 지난 1995년 국박 수장고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해당 목판은 1916년 조선총독부박물관 시절부터 수장고 내에 있었다. 이외에도 명나라 비단지본 마패인 부험(符驗), 원주 출토 고려 철조 아미타불상 등이 최근 발견됐다. 말 그대로 박물관 수장고는 가치를 헤아릴 수 없는 문화유산의 보물창고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인성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일제 수집 유물에 대해 “시기 별로 다양하게 수백 건의 발굴조사와 유물이 있다. 경주국립박물관에도 일제가 수집한 유물이 많이 소장돼 있다. 최신과학기술을 바탕으로 어떤 것을 발견해낼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그때는 세기의 발견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국박은 현재까지 일제강점기 발굴보고서와 도면 등 공문서와 유리 건판 사진을 절반 이상 공개했다. 내년까지 30만점 전체를 온라인에 공개할 방침이다. 깨진 유물은 보존처리하고, X선 성분분석과 실측 작업을 거쳐 종합보고서를 발간할 예정이다. 경주·부여·공주·대구·김해 등의 국립지역박물관도 함께 작업한다. 우선 순위에 따라 2022년까지 전체 46만점을 순차적으로 공개해 일제 수집 유물을 본격적으로 다루려는 시도다.

일제 수집 유물은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수집된 것일까. 조선총독부는 1910년 이래 한반도 내 유적과 유물, 역사자료, 인종, 언어, 풍속 등 다방면에 걸쳐 광범위한 학술조사를 기획했다.

총독부가 자금을 제공하고 일본인 학자들이 주축이 된 학술조사사업은 식민통치를 위한 기초자료를 수집하고 ‘식민통치논리’를 창출하는 작업이었다. 우리 문화의 타율성을 부각시켜 제국주의 사관을 정당화하는 정치적 목적에 봉사했던 것이다. 동시에 이들이 남긴 저작과 사진 등은 부족하나마 오늘날 한반도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총독부는 만주 소재 발해 도성 유적, 고구려·신라·백제·가야 고분, 소수의 석기시대 유적 등을 발굴했다. 민간에선 아마추어 고고학자 혹은 도굴꾼에 의해 일제강점기 내내 가치가 높은 문화재들이 일본으로 불법 반출되기도 했지만, 총독부에선 발굴을 통해 전국에서 모은 매장문화재를 조선총독부박물관과 경성제대박물관, 각 지역 부립박물관 등에 수장했다. 부립박물관은 오늘날 국립 지역 박물관의 모태가 됐고 해방 후 이들 수장품을 고스란히 인수받았다.

1945년 처음 문 열고 조사 
유물의 전모 지금도 파악중

앞서 정인성 교수는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반출을 금지했다. 유명 수집가들이 부산까지 가져갔다가 못 가져가게 하니까 평소 알고 지낸 조선인에게 맡기거나 팔거나 몰래 어선에 실어 빼돌리려 했다”면서 “조선인에게 믿고 맡겼는데 며칠 만에 도깨비시장에 나오는 등 사사로이 처분해버린 것이 많다”고 설명했다.


정 교수에 의하면 해방 후 대구국립박물관에서 일본인 소유 유물을 주도적으로 수집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을 내부자가 목록을 없애고 사적으로 착복했다. 유물들은 전쟁을 거치면서 모두 흩어져버렸다. 전국적으로 이러한 예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 고고학자는 일제 수집 유물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볼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그는 “식민지배의 당위성을 얻기 위한 활동의 일환이었다. 일본을 위한 ‘일본역사 새로 쓰기’였고, 그들만을 위한 문화재 정책, 박물관 정책이었다. 일제강점기 전 기간 동안 한국인을 배제하고 일제 권력자들이 그들만의 잔치를 한 것”이라고 전제했다.

그러나 이 학자는 “처음엔 식민사학과 관련된 것을 집중적으로 수집한 것으로 보이지만 고적조사 발굴이 체계적으로 궤도에 오른 후엔 (자기들 목적에 맞는 것만) 선별해서 박물관에 갖다놓은 것은 아닌 것 같다”며 “가능하면 모든 자료를 원칙에 맞춰서 박물관에 보관하고 순서에 따라 보고서를 쓴 것 같다”고 지적했다.  

행방 묘연했던
작품 나오기도

결국 일본인 학자들은 자신들의 학문활동이 제국주의 식민지배를 뒷받침하는 행위라는 것에 대한 자각이 없었던 것이다. 앞서 학자는 “고적조사와 같은 실증적인 활동들과 조선역사 새로 쓰기에 대한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고 난 다음에야 이 같은 다양한 주장들이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shin@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 비밀통로

현재 왕실 유물을 관리하는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의 지하 수장고는 지난 2005년 서울 용산으로 자리를 옮긴 국립중앙박물관의 수장고를 물려받은 것이다. 이 지하 수장고는 서쪽과 동쪽 공간으로 분리되는데, 각각 일제강점기와 박정희 시대에 건설된 것들이다. 경복궁 근정전∼광화문 사이 지하에 위치해 있으면서 바로 옆 서쪽에 위치한 고궁박물관까지 약 300m 길이의 통로가 조성돼 있다.

일제강점기에 건설된 서쪽 공간은 원래 방공호와 취조실이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서쪽 건물 1층에 일제가 파놓은 지하로 통하는 좁은 계단을 내려가면 그 끝에 두꺼운 철문이 보인다. 철문 뒤에 100㎡(30여평) 남짓한 규모의 방이 있다. 모래를 채워 방음을 시도한 흔적으로 볼 때 조선인 사상범을 심문한 취조실로 사용된 것으로 추측된다.

지하 11m 깊이에 위치한 동쪽 지하공간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만든 비밀 벙커였다. 국가 비상사태 발생에 대비해 원자탄 공격을 견디도록 철근 콘크리트로 2m 두께의 천장을 만들고 3중 철문 출입구와 제반시설을 잘 갖췄다. 정부요인의 비상대책회의와 기밀문서 보관 등 전시대비 업무를 준비한 곳이다.

벙커는 방수처리가 잘 돼 있고 널찍해서 수장고로 사용하는 데 문제가 없었다. 중앙홀이 위치한 좌우로 16개의 방으로 구성됐고 바닥은 너도밤나무로 마감하고 내부 진열장과 천정은 오동나무로 제작했다. 전체면적은 3734m²에 달한다. 총 소장유물은 4만4760점인데 지하 수장고에만 3만1000여점이 보관돼 있다.

고궁박물관은 지난 3월30일 수장고를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했다. 비록 10명만 수장고를 둘러본 제한적 공개였지만, 유물의 보존과 안전이 무엇보다 중요한 박물관 특성상 파격적인 일이었다. 오는 8월, 9월, 12월에도 신청을 받아 수장고와 보존과학실을 70분간 공개한다.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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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법률수석 부활 속셈

‘갑자기?’ 법률수석 부활 속셈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4·10 총선이 범야권의 승리로 끝났다. 집권여당은 참패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았다. 집권 3년차인 윤석열정부는 국정운영의 동력을 잃게 생겼다. 레임덕을 넘어 데드덕이라는 표현까지 나오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정치 인생 최대 위기에 직면했다. ‘식물 대통령’으로 전락한 윤 대통령의 다음 행보는 엇일까? 속사정이야 어떻든 숫자만 놓고 봤을 때 이견이 없는 결과가 나왔다. 범야권은 192석을 얻어 ‘반윤 거야’ 전선을 형성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161석, 민주당의 위성정당 더불어민주연합 14석, 조국혁신당 12석, 개혁신당 3석, 새로운미래 1석, 진보당 1석 등을 모두 합친 수치다. 국민의힘은 위성정당인 국민의미래 의석(18석)을 포함해 108석을 얻는 데 그쳤다. 완벽한 참패 식물 대통령 선거를 진두지휘한 각 당 대표의 희비도 엇갈렸다. 사법 리스크를 안고도 선거를 승리로 이끈 민주당 이재명 대표와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는 정국의 주도권을 잡게 됐고 국민의힘 한동훈 전 비상대책위원장은 정치 생명에 큰 타격을 입었다. 특히 윤석열 대통령은 실제 선거를 뛴 선수보다 더 큰 영향을 받게 됐다. 윤 대통령은 임기 내내 의회 주도권을 야당에 내준 상태로 정국을 운영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거부권(재의요구권)을 행사한다고 해도 여당의 이탈표를 걱정해야 한다. 총선이 끝나면서 권력의 무게추가 당으로 기울어지는 모양새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이미 거부권을 9차례나 사용한 이력이 민심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각 당은 이번 총선서 ‘정권 심판론’을 정면에 내세웠다. 민주당은 윤석열정부 심판, 국민의힘은 ‘이조(이재명-조국) 심판’ 프레임으로 유권자들에게 지지를 호소했다. 국민은 범야권에 의석을 몰아주면서 정부 심판의 손을 들어줬다. 윤석열정부에 대한 중간평가에 ‘낙제점’을 준 것이다. 윤석열정부는 당장 밀어붙이고 있던 정책에 차질을 빚게 됐다.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을 골자로 하는 의료개혁이 대표적이다. 윤 대통령은 총선 패배 메시지를 통해 의료개혁을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드러냈지만 추진력에 대해서는 의문부호가 붙는다. ‘카르텔 타파’라는 국정기조도 흔들릴 가능성이 높다. 윤 대통령은 지난 16일, 총선 결과와 관련해 첫 육성 메시지를 내놨다. 총선 참패 후 엿새 만이다. 민정수석실 폐지 대선공약 민심 청취 명분 부활 예고 윤 대통령은 “총선을 통해 나타난 민심을 우리 모두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올바른 국정의 방향을 잡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에도 국민들께서 체감하실 만큼의 변화를 만드는 데 모자랐다”며 “큰 틀에서 국민을 위한 정책이라 해도 세심한 영역서 부족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윤석열정부서 추진하고 있던 개혁은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드러냈다. 윤 대통령은 “노동, 교육, 연금 등 3대 개혁과 의료개혁을 계속 추진하되, 합리적인 의견을 더 챙기고 귀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국회와의 긴밀한 협력을 말했지만 야당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진 않았다. 윤 대통령의 메시지에 야권에서는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민주당 홍익표 원내대표는 윤 대통령의 메시지에 대해 “개탄스럽다”며 “오만, 독선, 불통 정치를 계속하겠다는 마이웨이 선언”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이번 총선서 확인한 민심은 국정기조 전면 전환과 민생경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할 방안을 제시해 달라는 주문”이라며 “윤 대통령은 국정 실패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민생경제의 잘못을 인정하고 실질적 대책과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 대통령이 총선 패배에 대한 목소리를 내면서 이후 내놓을 쇄신안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미 국무총리와 대통령비서실장 인선과 관련한 하마평이 나오는 중이다. 지난 17일에는 대통령실서 국무총리로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을, 비서실장에 양정철 전 민주연구원장을 고려하고 있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일단 대통령실에서는 “검토한 바 없다”고 대응한 상태다. 3대 개혁 밀어붙인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현재 비서실장 아래에 있는 공직기강비서관실과 법률비서관실을 관장할 ‘법률수석비서관실(가칭)’이 신설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민심 청취 기능을 강화하겠다는 취지다. 민정수석이 존재할 당시 폐해로 여겨졌던 사정 기능은 제한하고 민심을 읽는 방향의 조직을 만들 것이라는 구체적인 언급도 나오고 있다. 이 과정서 사실상 민정수석실이 부활하는 게 아니냐는 의견이 나왔다. 민정수석실 폐지는 윤 대통령의 대선공약 중 하나였다. 윤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 “앞으로 대통령실 업무서 사정, 정보 조사 기능을 철저히 배제하고 민정수석실을 폐지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어 “과거 사정기관을 장악한 민정수석실은 합법을 가장해 정적, 정치적 반대 세력을 통제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세평 검증을 위장해 국민 신상 털기와 뒷조사를 벌여왔는데 이런 잔재를 청산하겠다”고 말했다. 실제 윤석열정부 출범 직전 대통령실은 2실(비서실·국가안보실) 5수석(경제·사회·정무·홍보·시민사회) 체제로 개편됐다. 당시 당선인 신분이었던 윤 대통령이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청산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윤석열정부 출범 3개월 만에 정책기획수석이 신설되면서 2실6수석 체제가 됐다. 민정수석실서 맡고 있던 공직기강 업무와 인사검증 업무는 법률비서관, 법무부 등으로 이관됐다. 특히 법무부에 공직자 검증 업무를 전담하는 인사정보관리단이 신설되면서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던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에 권력이 지나치게 집중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기도 했다. 사정 기능 제한한다? 지난해 11월 윤 대통령은 정책실장을 신설하는 등 대통령실 직제를 3실6수석 체제로 개편했다. 개편 과정서 기존 수석들을 물갈이하면서 대통령실 2기 체제의 출범을 알렸다. 이때도 민정수석실 관련 언급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총선 패배 이후 대통령실 쇄신안에 법률수석이 거론되면서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야당은 즉각 반발했다. 민심 청취는 표면용일 뿐 결국 윤 대통령이 사정정국을 조성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고 지적했다. ‘민정수석실 폐지’라는 대선공약을 파기하고 여소야대 정국을 돌파하기 위한 자구책이라는 설명이다. 여기에 야당서 예고한 특검을 방어하려는 선제적 조치가 아니냐는 비판도 나왔다. 당초 민정수석실은 민심 청취 기능과 무관하게 운영됐다. 오히려 폐지 가능성이 나오고 있는 시민사회수석실이 민심을 듣는 역할을 해왔다. 민정수석은 고위공직자 인사 검증, 국정 관련 여론 수렴, 고위공직자 복무 동향 점검, 대통령 친인척 관리, 사정기관과 소통 등의 업무를 주로 했다. 하지만 역대 정부서 가장 부각됐던 기능은 국가정보원, 검찰, 경찰, 국세청, 감사원 등 5대 사정기관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실제 2000년 김대중정부서 폐지되기 전까지 이른바 ‘사직동팀’이 청와대 하명수사를 전담했다. 사직동팀은 경찰청 형사국 조사과를 일컫는 말이다. 윤 대통령 역시 당선인 시절 대통령 인수위원회 첫 과제로 민정수석실 폐지를 밀어붙이며 “사직동팀은 있을 수 없다”고 강조한 바 있다. 대통령실은 법률수석을 신설하더라도 사정 기능은 제한하겠다는 뜻을 비쳤지만 의심의 눈초리는 여전하다. 김건희·채 상병 특검법 대기 신임 수석 검찰 출신 될 듯 민주당 고민정 최고위원은 지난 16일 MBC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법률수석 신설은 앞으로 들이닥칠 영부인에 대한 특검 등을 방어하겠다는 것으로 해석된다”며 “이제 와서 법률수석비서관실을 신설한다는 것은 사법 리스크 방어 차원”이라고 주장했다. 21대 국회에 이어 22대 국회서도 여소야대 정국이 유지되면서 민주당 등 범야권은 ‘해병대 채 상병 사망사건 수사외압 의혹 특별검사법(채 상병 특검법)’과 ‘김건희 여사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 특별검사법(김건희 여사 특검법)’ 등을 예고했다. 국민의힘서도 채 상병 특검법 수용과 관련해 의견이 갈리는 만큼 국회 통과 가능성이 제기된다. 윤 대통령은 채 상병 특검법에 대해 한 차례 거부권을 행사한 상태다. 192석을 확보한 범야권은 21대 국회서 채 상병 특검법이 좌절된다고 해도 22대 국회서 재추진한다는 뜻을 보이고 있다. 고민정 최고위원도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채 상병의 죽음 앞에 정치권이 더는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민주당서도 의지가 충분히 있고 국회서 당장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돼있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언급했다. 김건희 여사 특검법도 22대 국회 개원 전후로 다시 도마에 오를 전망이다. 12석을 확보한 조국혁신당은 아예 22대 국회 1호 법안으로 김건희 여사 특검법을 공언했다. 민주당과 개혁신당 등이 조국혁신당에 동의한다는 뜻을 보인 만큼 추진 가능성은 어느 때보다 높다. 국민의힘 내부서도 수용 여부에 대한 의견이 갈리고 있어 향후 상황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사정기관 잡고 흔드나 범야권이 다수 의석을 무기로 특검 정국을 예고하면서 윤 대통령과 여당에 대한 압박 수위가 높아지는 모양새다. 법률수석을 새로 만들려는 의도가 ‘방어’로 읽히는 분위기도 윤 대통령이 처한 상황이 녹록지 않기 때문으로 보인다. 심지어 총선이 마무리되면서 국민의힘에 대한 윤 대통령의 지배력 역시 작아진 상태라는 점도 법률수석 신설의 배경으로 꼽히고 있다. 이미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레임덕을 최대한 늦추기 위한 궁여지책이라는 말도 나온다. 신임 법률수석을 누가 맡게 될지를 두고 정치권에서는 벌써부터 하마평이 돌고 있다. 검찰 출신들로 채워질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jsjang@ilyosisa.co.kr>